'최고의 발명'의 대명사가 된 자른 식빵 — 정작 태어난 지 15년 만에 불법이 됐다 — Woody Magazine, 2026년 7월 7일
'최고의 발명'의 대명사가 된 자른 식빵 — 정작 태어난 지 15년 만에 불법이 됐다
새로 나온 물건이 근사할 때, 영어권 사람들은 오래된 관용구 하나를 꺼냅니다. "자른 식빵 이후 최고(the greatest thing since sliced bread)." 스마트폰이든 인공지능이든, 무언가를 인류 최고의 발명 반열에 올리고 싶을 때 쓰는 상투구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에는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왜 하필 식빵일까요. 그것도 그냥 빵이 아니라 '잘라 놓은' 빵.
더 이상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자른 식빵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게 바로 98년 전 오늘, 1928년 7월 7일입니다. 빵은 수천 년 묵은 음식이지만, 기계로 잘라 파는 식빵은 100년이 채 안 됐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어떤 독자보다도 어린 발명품입니다. 그리고 그 식빵은, 태어난 지 15년 만에 미국에서 불법이 됐습니다.
보석상이 만든 기계
이야기는 아이오와 출신 보석상 오토 로웨더(Otto Rohwedder, 1880~1960)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빵을 파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미주리주 세인트조지프에서 보석 가게 세 곳을 운영하던 사업가였죠. 그런데 빵칼로 빵을 써는 일이 어지간히 성가셨던 모양입니다. 손으로 썰면 두께가 제멋대로였고, 힘도 들었습니다. 로웨더는 빵을 균일하게 잘라 주는 기계를 떠올렸고, 여기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보석 가게를 팔아 자금을 마련할 정도였습니다.
첫 좌절은 1917년에 왔습니다. 공장에 불이 나 시제품과 설계도가 모두 잿더미가 됐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그사이 로웨더는 한 가지를 더 알아냈습니다. 빵을 자르면 잘린 면으로 수분이 빠져나가 더 빨리 굳는다는 것. 처음엔 슬라이스가 흩어지지 않게 큰 핀으로 빵을 꿰어 고정해 봤지만, 삐져나온 핀 탓에 빵이 지저분해 보인다는 불평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계는 자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곧바로 왁스 먹인 기름종이로 감싸도록 설계됐고, 핀은 오래지 않아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 '포장'이 뒤에 벌어질 사건의 열쇠가 됩니다.
1928년, 로웨더는 옛 친구이자 미주리주 칠리코시(Chillicothe)에서 작은 빵집을 하던 프랭크 벤치(Frank Bench)를 설득합니다. 대공황 직전, 벤치의 빵집은 형편이 넉넉지 않았지만 그는 기계를 한번 돌려 보기로 합니다. 두 사람은 지역 신문 〈컨스티튜션 트리뷴〉에 광고를 냅니다. 헤드라인은 "여기서 자른 식빵을 만듭니다(Sliced Bread Is Made Here)." 본문은 이렇게 자신했습니다. "빵을 포장하기 시작한 이래, 제빵업의 가장 큰 진일보." 그리고 1928년 7월 7일, 클린 메이드(Kleen Maid)라는 이름의 자른 식빵이 세상에 처음 진열됐습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습니다. 벤치 빵집의 매출은 두 주 만에 2,000% 뛰었습니다. 주부들은 더 이상 식구 수만큼 빵을 일일이 썰 필요가 없었습니다. 2년 뒤 원더 브레드(Wonder Bread)가 전국에 자른 식빵을 깔았고, 1933년에는 자른 빵이 안 자른 빵을 앞질렀습니다. 팝업 토스터가 대중화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자를 필요가 없는 균일한 빵이 있으니, 그걸 넣어 구울 기계가 팔렸습니다.
여기까지가 "자른 식빵 이후 최고"라는 말이 생겨난 배경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관용구가 저 칠리코시 광고 문구에서 곧장 나왔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정확히 누가 언제 처음 "since sliced bread"라고 말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건 1940년대를 지나며 이 표현이 '역대 최고'의 대명사로 굳었다는 사실뿐입니다.
미국이 그 판매를 금지한 1943년까지
정부가 빵을 금지하던 날
1943년 1월 18일, 미국 농무부 장관 클로드 위카드(Claude R. Wickard)가 '식량 배급 명령 1호(Food Distribution Order No. 1)'를 발동합니다. 핵심 조항은 이랬습니다. 빵집은 미리 자른 빵을 팔 수 없다. 자르는 건 각 가정에서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명령에 서명한 위카드는 두 달 전에도 다른 방식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입니다. 오하이오의 한 농부가 팔지 않고 자기 가축에게 먹이려 기른 밀까지 연방이 규제할 수 있다고 본 1942년 대법원 판례 '위카드 대 필번(Wickard v. Filburn)'의 바로 그 위카드죠. 농부의 밀 한 줌이든 빵집의 칼질이든, 일상의 사소한 선택에까지 연방의 손이 닿는다는 점에서 두 장면은 겹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이미 1942년부터 설탕, 휘발유, 타이어, 커피가 배급제로 묶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참는 데 익숙했습니다. 하지만 빵은 달랐습니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1943년 2월 1일 자에서, 할머니 대의 낡은 톱니칼을 다시 꺼내 든 주부들의 풍경을 전했습니다. 삐뚤빼뚤 썰린 조각은 토스터에도 안 들어갔고, 아침 식탁마다 짜증이 났습니다.
왜 하필 빵이었을까요. 정부가 내세운 공식 이유는 포장지였습니다. 앞서 로웨더가 알아낸 바로 그 문제입니다. 자른 빵은 더 빨리 굳으니 신선도를 지키려면 더 두꺼운 왁스 기름종이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왁스는 전쟁 물자였습니다. 차량과 장비를 습기에서 지키는 데 쓰였으니까요. 여기에 밀가루값을 눌러 두려는 계산, 자르는 기계에 들어가는 철강, 늘어난 빵 소비로 인한 밀 낭비 우려까지 명분으로 얹혔습니다.
빵을 자른다는 건 단순히 칼질을 대신해 주는 편의가 아니었습니다. 자르는 순간, 빵은 예전엔 없던 새로운 의존 하나를 얻었습니다. 포장입니다. 안 자른 빵은 하루쯤 두어도 겉만 마르지만, 자른 빵은 잘린 면 전체로 말라 갑니다. 그래서 더 많이, 더 두껍게 감싸야 했습니다. 평시에는 보이지 않던 이 비용이, 물자가 귀해진 전시에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두 달을 못 버틴 규제
문제는 명분이 하나씩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밀 부족이 걱정이라지만, 그해 미국은 대풍을 맞아 10억 부셸이 넘는 밀을 쌓아 두고 있었습니다. 약 2,700만 톤, 식빵 700억 덩어리를 구울 양입니다. 새로 수확하지 않아도 2년은 버틸 재고였습니다. 왁스 기름종이 역시 제빵업체 손에 몇 달 치가 남아 있었습니다. 기계용 철강을 아낀다지만, 대부분의 빵집은 이미 기계를 가지고 있어 새로 사지도 않았습니다.
결정타는 형평성이었습니다. 규제 일주일 만에 뉴욕 시장은 "이미 기계를 갖춘 빵집은 계속 잘라 팔아도 된다"고 발표합니다. 그러자 자른 빵을 파는 집과 못 파는 집이 갈렸습니다. 애초의 금지 취지가 무색해진 겁니다. 반발은 정치권과 신문으로 번졌습니다.
결국 1943년 3월 8일, 위카드는 금지령을 거둡니다. 발동 두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습니다. 그는 규제의 인기 없음을 인정하는 대신, "예상만큼 절약되지 않았고, 자른 빵을 감쌀 왁스 기름종이가 넉 달 치나 남아 있다"고만 밝혔습니다. 명분 없는 규제를 거두면서도, 끝까지 명분만은 챙겼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자른 빵을 샀습니다. 1950년대에 이르면 미국인은 하루 여섯 조각씩 공장제 식빵을 먹었고, 두 달간의 소동은 전시의 우스운 일화로 잦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빵은 여전히, 세상 모든 새로운 것의 잣대가 됐습니다.
당연함은 저항 뒤에 온다
자른 식빵 이야기가 남기는 건 "정부가 황당한 규제를 했다"는 웃음거리가 아닙니다. 진짜 핵심은 그 앞에 있습니다. 오늘날 '최고'를 칭할 때 우리가 반사적으로 꺼내 드는 그 기준조차, 처음엔 제빵사들이 "금방 굳는다"며 미심쩍어했고, 소비자들이 "빵은 원래 집에서 써는 것"이라며 낯설어했으며, 급기야 정부가 팔지 못하게 막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식빵 밖에서도 써먹을 수 있습니다. 어떤 물건이 '○○ 이후 최고'라는 잣대가 됐다면, 그게 처음 나왔을 때 어떻게 대접받았는지 한 번쯤 되짚어볼 만합니다. 당연함은 대개 저항을 통과한 뒤에 옵니다.
식빵만 그랬던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어디서나 마시는 커피도, 1675년 영국의 찰스 2세가 '불온한 소문의 소굴'이라며 커피하우스를 닫으라는 포고령을 내렸다가 반발에 밀려 시행 직전에 거둬들인 물건입니다. 비 오는 날 누구나 드는 우산도 마찬가지입니다. 1750년대 런던에서 처음 우산을 쓰고 다닌 조너스 하웨이(Jonas Hanway)는 '나약한 프랑스식'이라며 조롱받았고, 그 물건이 당연해지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의심하는 새로운 무언가도, 언젠가 누군가의 '자른 식빵'이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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