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 전 오늘, 야구장이 디스코를 폭파했다 — 그런데 디스코는 죽지 않았다. 바로 그 도시에서, 이름을 바꿔 살아남았다
47년 전 오늘, 야구장이 디스코를 폭파했다 — 그런데 디스코는 죽지 않았다. 바로 그 도시에서, 이름을 바꿔 살아남았다
'디스코가 죽은 날'로 기록된 1979년 7월 12일의 야구장 폭동. 그러나 그 폭동은 디스코를 죽인 게 아니라 지하로 되돌려보냈다. 지금 차트를 채우는 사운드는 그날 폭파된 레코드의 손자뻘이다.
1979년 7월 12일 저녁, 미국 시카고 코미스키 파크. 야구장 한복판에 나무 상자 하나가 놓였습니다. 안에는 관중이 들고 온 디스코 레코드 수천 장이 담겼습니다. 록 라디오 DJ 스티브 달이 군용 헬멧을 쓰고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관중석에서 "디스코 서크스(disco sucks·디스코는 구리다)"라는 함성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폭약이 터졌습니다.
폭발 직후 수천 명이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잔디에 모닥불이 피어올랐고, 시설이 부서졌으며, 베이스가 뽑혀 사라졌습니다. 진압 경찰이 들어와 40분 만에 관중을 몰아냈고, 39명이 체포됐습니다. 그날은 프로야구 화이트삭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가 두 경기를 연달아 치르는 날이었는데, 그라운드가 엉망이 되면서 두 번째 경기는 그날 밤 취소됐고, 이튿날 리그가 화이트삭스의 몰수패로 확정했습니다. 이 사건은 곧 '디스코가 죽은 날(the day disco died)'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음악 한 장르가 싫다고 5만 명이 야구장에 모여 레코드를 폭파합니다. 사건의 전말을 모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장면입니다. 이 폭동은 세 개의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디스코는 대체 누구의 음악이었나.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그 음악을 싫어했나. 그 미움은 어떻게 5만 명의 폭동으로 번졌나. 이 세 갈래를 따라가면 '유행이 지나 죽었다'는 흔한 설명이 사실과 어긋난다는 게 드러납니다.
지금 디스코는 '반짝이 옷과 미러볼'의 촌스러운 옛 유행쯤으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출발은 전혀 달랐습니다. 1970년대 초 디스코는 주류의 음악이 아니라, 뉴욕과 시카고의 흑인·라틴계,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모이던 지하 클럽의 음악이었습니다.
이들이 지하로 모인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흑인·라틴계와 성소수자는 일반 술집이나 클럽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인종과 성적 지향을 이유로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일 공간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심야에만 여는 회원제 클럽, 창고를 빌린 파티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밖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안에서만큼은 마음껏 춤출 수 있는 해방구, 디스코는 그 방들에서 울리던 소리였습니다.
이 음악이 지하를 벗어나 전국을 뒤덮은 계기는 1977년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였습니다. 존 트라볼타의 흰 정장과 함께 디스코는 순식간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악이 됐습니다. 1979년 2월 그래미 시상식은 디스코 앨범이 휩쓸었습니다. 그러니 1979년의 디스코는 '소수의 음악'이 아니라 '온 나라를 점령한 음악'이었습니다. 무언가가 격렬한 반발의 대상이 됐다는 건, 역설적으로 그만큼 커졌다는 뜻입니다.
흔히 'disco sucks'를 대중이 자연스럽게 싫증 낸 결과로 압니다. 하지만 그 반발의 한복판에는 취향이 아니라 생계가 걸린 집단이 있었습니다. 바로 록 음악 진영, 그중에서도 라디오 방송국들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라디오 업계에는 큰 흐름이 하나 있었습니다. 청취율을 좇아 록 음악 방송을 접고 디스코 전문 방송으로 갈아타는 방송국이 우후죽순 생긴 것입니다. 디스코가 워낙 인기였으니 방송국 입장에선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바람에 록을 틀던 DJ들이 대거 일자리를 잃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 폭동을 주도한 스티브 달이 바로 그 피해자였습니다. 24세의 록 DJ였던 그는 1978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해고당했습니다. 그가 일하던 시카고 방송국이 디스코 포맷으로 갈아탔기 때문입니다. 새 록 방송국에 자리를 잡은 달은 방송에서 디스코 레코드를 부러뜨리고 폭발음을 내며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스코라는 질병의 박멸"을 구호로 내걸었고, 청취자들이 열광했습니다. 정리하면, 디스코가 밀어낸 건 록 음악만이 아니라 록 DJ들의 밥벌이였습니다. 그래서 반발이 유난히 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반발은 자연발생적이라기보다 상당 부분 조직된 것이었습니다. 록 방송국들은 청취율을 되찾으려고 '디스코는 구리다' 클럽을 만들고 티셔츠를 팔며, 젊은 백인 남성 청취자를 겨냥한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시카고역사박물관은 이 운동을 "젊은 백인 남성층을 표적으로 한 마케팅 수법"이라고 정리합니다. '디스코는 구리다'는 순수한 취향 표현이 아니라, 청취율 전쟁의 무기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미움이 크다고 곧바로 5만 명의 폭동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날은 우연과 필연이 몇 겹으로 겹쳤습니다.
첫째, 라디오 DJ의 영향력입니다. 지금과 달리 당시 인기 FM DJ는 지역의 스타였습니다. 달은 매일 방송에서 디스코를 조롱하며 수많은 청취자를 자기편으로 결집시켜 놓은 상태였습니다. 둘째, 구단의 절박함입니다. 화이트삭스는 그해 관중이 안 들어와(평균 1만5천 명 수준) 뭐든 이벤트가 필요했습니다. 기발한 프로모션으로 이름난 구단주 빌 벡과, 그의 아들이자 구단 홍보 담당이던 마이크 벡이 달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였습니다.
셋째, 거의 없다시피 한 진입장벽입니다. 디스코 레코드 한 장만 들고 오면 단돈 98센트에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방송국 주파수 97.9에 맞춘 가격). 부담이 없으니 사람이 몰렸습니다. 넷째, 준비 부실입니다. 방송국과 구단은 평소보다 5천 명쯤 더 올 걸로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정원을 훌쩍 넘겨 몰려들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들고 온 레코드를 제대로 걷지 못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수거함이 넘치자 관중은 레코드를 그냥 좌석까지 들고 갔고, 흥분한 사람들 손에서 그것이 프리스비처럼 날아다니는 흉기가 됐습니다. 보안 인력은 밖에서 무단 입장을 막느라 정작 그라운드는 무방비였습니다. 이 모든 게 겹쳐, 폭발과 함께 약 7,000명이 필드로 뛰어들며 통제 불능 상태가 된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그날의 대립은 '디스코 대 록'이었습니다. 그러나 디스코의 뿌리가 흑인·성소수자 문화였던 탓에, 그 반발은 음악 취향을 넘어선 색을 띠게 됩니다. 이걸 보여주는 결정적인 정황이 하나 있습니다. 그날 안내원들은 관중이 디스코뿐 아니라 펑크와 R&B 음반까지 들고 왔다고 증언했습니다. 흑인 음악가들의 다른 장르까지 함께 폭파 대상이 됐다는 뜻입니다. 디스코 밴드 시크(Chic)의 나일 로저스는 이튿날 그 영상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반론이 있습니다. 주동자 스티브 달 본인은 지금도 이 해석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디스코 레코드를 폭파하고 비지스와 〈토요일 밤의 열기〉를 놀렸을 뿐, 그 이상은 없었다. 멍청한 라디오 프로모션은 그냥 멍청한 라디오 프로모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5만 명 전부가 한 사람의 인종적 악의에 동원됐다고 보는 건 분명 지나칩니다.
하지만 의도와 효과는 다릅니다. 그날 코미스키 파크에서 안내원으로 일하던 사우스사이드 출신 고등학생 빈스 로런스는 흑인이었습니다. 폭동 속에서 낯선 남자들이 그에게 달려와 얼굴 앞에서 레코드를 반으로 꺾으며 "이게 우리가 디스코한테 하는 짓이야"라고 외쳤습니다. 그를 '디스코'로 지목한 유일한 표지는 피부색이었습니다. 주최자가 무엇을 의도했든, 그 자리에 온 상당수의 마음속에서 과녁은 음악이 아니라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디스코가 죽은 날'이라는 이름은 절반만 맞습니다. 디스코가 상업 차트에서 밀려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변신은 폭동 뒤에 비로소 시작된 게 아닙니다. 폭동이 디스코를 차트 밖으로 밀어내던 바로 그 무렵, 같은 도시의 지하에서는 이미 디스코가 다른 음악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주류가 "죽었다"며 눈을 뗀 바로 그 자리에서 말입니다.
그 무대가 된 도시는 공교롭게도 시카고, 바로 그 폭동이 벌어진 도시였습니다. 폭동보다 2년 앞선 1977년, 뉴욕 출신 DJ 프랭키 너클스가 시카고의 한 클럽 '더 웨어하우스(The Warehouse)'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흑인과 라틴계 성소수자들이 밤새 춤추던 곳입니다. 너클스는 여기서 디스코와 펑크, 독일 전자음악을 릴 테이프로 잘라 붙이고 드럼머신으로 두껍게 깔며 새로운 소리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클럽에서 나오는 음악을 클럽 별명 그대로 '하우스(house)'라 불렀습니다(클럽 주인이 홍보 전단에 '하우스 음악'이라 적은 데서 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클럽을 채우는 하우스 뮤직이라는 장르의 이름은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야구장에서 디스코가 폭파되던 그 여름, 몇 정거장 떨어진 이 창고에서는 이미 그 디스코가 다음 형태로 자라고 있었던 셈입니다.
하우스의 대부로 불리는 너클스는 이 음악을 한마디로 정의한 것으로 널리 전해집니다.
이 한 문장에 모든 게 담겨 있습니다. 하우스는 디스코가 겪은 차별 때문에, 혹은 그 차별에도 불구하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하우스는 시카고를 넘어 디트로이트의 테크노, 뉴욕과 유럽의 댄스 음악으로 퍼져, 오늘날 수십억 달러 규모의 전 세계 산업이 됐습니다.
이 부활은 한 사람의 삶으로도 압축됩니다. 앞서 폭동의 밤, 자기 얼굴 앞에서 레코드가 꺾이는 걸 지켜봐야 했던 그 고등학생 안내원, 빈스 로런스입니다. 그는 그날 당한 폭력에 대한 합의금으로 신디사이저 한 대를 샀고, 몇 년 뒤 그 악기로 시카고 하우스의 초기 레코드로 꼽히는 'On and On'을 함께 만들었습니다. 시카고 하우스의 산실이 된 레이블 트랙스 레코드(Trax Records)도 그가 세운 것입니다. 훗날 로런스는 그날을 이렇게 돌아봤습니다.
이 이야기가 박물관 속 옛일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2023년, 비욘세가 그래미 역사상 최다 수상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 마지막 트로피가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앨범 부문이었고, 수상작은 하우스에 바친 앨범 〈Renaissance〉였습니다. 무대에 오른 비욘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장르를 발명해준 퀴어 커뮤니티에 감사드립니다."
같은 해, 프랭키 너클스가 하우스를 만든 그 창고 건물은 시카고시의 공식 랜드마크로 지정됐습니다. 한때 야구장에서 폭파된 소리가, 이제는 도시의 문화유산으로 보존됩니다. 두아 리파부터 비욘세까지, 최근 몇 년간 팝 차트를 채운 반짝이는 4분의 4박자 사운드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에는 1979년 7월 12일 야구장 그라운드에서 터진 레코드 상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디스코 데몰리션 나이트가 우리에게 남기는 건 단순한 소동의 기록이 아닙니다. 다른 자리에도 그대로 옮겨 놓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 많은 사람이 무언가를 조직적으로 "싫어한다"고 외칠 때, 그 미움의 진짜 과녁은 취향이 아니라 그 취향을 가진 '누구'인 경우가 많습니다. 둘. 어떤 문화를 향해 "죽었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 문화는 오히려 주류의 감시를 벗어나 지하에서 다음 형태로 자라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포인트
야구장의 폭발은 디스코를 죽인 게 아니라, 주류가 눈을 뗀 지하로 되돌려보냈다. 그래서 '디스코가 죽은 날'은 정확히 같은 도시에서 하우스가 잉태된 날이기도 하다.
- 「출처 ↗」 Chicago History Museum — Disco Demolition Night at Comiskey Park
- 「출처 ↗」 MLB.com — Looking back on Disco Demolition Night
- 「출처 ↗」 Britannica — Disco Demolition Night
- 「출처 ↗」 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 (SABR)
- 「출처 ↗」 NPR — 'The Night Disco Died' — Or Didn't
- 「출처 ↗」 NPR — From the Warehouse to the world: Chicago and the birth of house music
- 「출처 ↗」 GRAMMY.com — Renaissance & the roots of house music
- 「출처 ↗」 HISTORY — July 12, 1979
- 「출처 ↗」 Chicago Magazine — House Divided (빈스 로런스와 디스코 데몰리션)
- 「출처 ↗」 City of Chicago — The Warehouse, Chicago Landmark (2023, 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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