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3만 명이 걸은 산티아고 순례길 — 그 길은 1984년, 시골 신부의 페인트 통에서 다시 시작됐다 — Woody Magazine, 2026년 7월 25일
Woody Magazine
뉴스가 아닌 것들을 씁니다
2026년 7월 25일 (토)
지난해 53만 명이 걸은 산티아고 순례길 — 그 길은 1984년, 시골 신부의 페인트 통에서 다시 시작됐다
오늘 산티아고 대성당 앞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례자들은 담벼락과 바위에 칠해진 노란 화살표를 따라왔습니다. 그 화살표를 처음 그린 사람은 스페인 산골의 본당 신부이고, 그가 페인트 통을 산 해는 1984년입니다.
오늘 오브라도이로 광장에는 배낭을 멘 사람들이 온종일 들어옵니다. 7월 25일, 성 야고보 축일입니다. 대성당이 1년 중 가장 붐비는 날이자 갈리시아 자치정부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여기까지 온 방법은 단순합니다. 담벼락과 바위와 나무 밑동에 칠해진 노란 화살표를 따라왔습니다. 화살표는 갈림길마다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지도가 없어도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 화살표가 언제 생겼는지 묻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1984년입니다. 순례길의 나이가 1,100년쯤이라면, 화살표의 나이는 마흔둘입니다.
1986년 8월 14일, 그날의 신기록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글은 대개 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천 년 넘게 끊긴 적 없는 길이라는 문장입니다. 앞부분은 맞습니다. 9세기에 갈리시아에서 사도 야고보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자리가 나왔습니다. 11세기부터 13세기 사이 이 길은 예루살렘과 로마에 견줄 만한 순례지로 올라섰습니다.
뒷부분이 문제입니다. 종교개혁과 전쟁을 지나며 순례는 줄었고,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멎었습니다. 얼마나 멎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순례 전문지 『페레그리노』를 만든 호세 안토니오 오르티스는 1986년에 이 길을 걸었습니다. 8월 14일 산티아고에 닿아 대성당에서 순례 증명서를 받으려 하자, 사무소 직원이 오늘 신기록이 나왔다고 알려줬습니다. 그날 순례를 마치고 도착한 사람은 스무 명이었습니다. 제1호 유럽 문화의 길 지정 30주년 기획 인터뷰에서 그가 직접 밝힌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8월이 가장 붐빕니다. 지난해 산티아고에 도착해 증명서를 받은 사람은 이만큼입니다.
페인트 통 하나와 시트로엥 한 대
이 격차의 출발점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엘리아스 발리냐 삼페드로(Elías Valiña Sampedro)입니다. 1929년 루고주의 작은 마을 문딘에서 태어났고, 1957년에 사제가 되어 오세브레이로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본당으로 갔습니다. 해발 1,300미터, 프랑스 길이 갈리시아로 넘어 들어오는 안개 낀 산마을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32년을 그 본당에서 지냈습니다.
발리냐는 시골 신부이면서 이 길의 연구자였습니다. 코미야스 교황청립대학에서 교회법을 공부했고 살라망카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60년대에 쓴 그의 박사논문 제목은 「산티아고 순례길: 역사적·법적 연구」입니다. 1971년 스페인 국립연구위원회가 이 논문을 책으로 냈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길은 문서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어느 마을에서 어느 다리를 건너 어느 고개를 넘는지가 12세기 기록에 다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밖에 나가 보면 어디가 그 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떤 구간은 아예 지나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장서는 그대로인데 청구기호만 사라진 도서관이었습니다. 책이 없어진 게 아니라 찾을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발리냐가 고른 해결책은 지도도 안내서도 아니었습니다. 현장에 표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1984년, 그는 도로 공사장에서 쓰고 남은 노란 페인트를 싸게 사들여 시트로엥 2CV에 싣고 피레네 기슭의 론세스바예스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산티아고까지 내려오며 갈림길마다 화살표를 그렸습니다. 복사들이 따라붙었고, 지역마다 생기던 순례길 친구회 회원들도 함께 나섰습니다.
노란색을 고른 이유로는 세 가지가 전해집니다. 멀리서도 눈에 잘 띕니다. 순례자가 가장 많이 오는 프랑스에서는 등산로 표시에 노란색을 쓰지 않아 혼동될 일이 없었습니다. 첫 물량이 마침 도로 표시용 노란색이기도 했습니다.
널리 전해지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스페인 자료들도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는 단서를 달고 옮깁니다. 발리냐가 국경 고갯길에서 페인트 통을 들고 화살표를 그리고 있을 때 과르디아 시빌 대원들이 다가와 무엇을 하는 중이냐고 물었습니다. 무장조직 ETA가 활동하던 시기의 국경이었습니다. 신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프랑스 쪽에서 대규모 침공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표지판 위에 예산이 얹히다
화살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페인트는 벗겨집니다. 그런데 표시가 생기고 3년 뒤, 그 위에 제도가 얹혔습니다.
1987년 10월 23일, 유럽평의회는 산티아고에서 이 순례길을 제1호 유럽 문화의 길로 선포했습니다. 유럽 통합을 문화로 뒷받침할 상징이 필요했고, 여러 나라를 가로지르는 이 길이 그 자리에 들어맞았습니다. 지정이 나오자 각국 지방정부가 예산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1993년에는 두 가지가 겹쳤습니다. 유네스코가 프랑스 길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고, 같은 해가 성년이었습니다. 갈리시아 자치정부는 '샤코베오 93'이라는 이름으로 마스코트까지 만든 관광 캠페인을 돌렸습니다. 그해 순례자는 10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이후는 계단식입니다. 2010년 성년에 27만 2천 명, 2019년에 34만 7,578명을 기록했습니다. 2020년에 5만 4,144명으로 주저앉았다가 2022년에 43만 8,208명으로 되올라섰고, 지난해 53만여 명에 닿았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결론이 하나로 모입니다. 이 길을 되살린 것은 신앙의 회복이 아니라 표시와 예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람들이 걷는 이 길은 만들어진 전통일까요.
800년 전 안내서도 같은 일을 했다
대답은 아니라는 쪽입니다. 그 근거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12세기 중반에 엮인 『칼릭스티누스 고사본』이라는 필사본이 산티아고 대성당에 남아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고, 다섯 권 가운데 5권이 순례자를 위한 안내서입니다. 흔히 세계 최초의 여행 안내서로 불립니다.
이 5권이 무엇을 적었는지 보면 성격이 분명해집니다. 어디서 묵을지, 어느 성당의 유물이 진짜인지, 어떤 사기를 조심할지가 적혀 있습니다. 물맛까지 구간별로 평가합니다. 나바라의 어느 강에 대해서는 사람이든 말이든 마시면 죽는다고 경고하면서, 강가에 그 지역 사람 둘이 칼을 갈며 앉아 있었다고 씁니다. 물이 안전하냐고 묻자 그들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말 두 마리가 곧바로 쓰러졌고, 그들은 가죽을 벗겼습니다.
결정적인 대목은 그다음입니다. 5권은 1120년부터 라바날에서 포르토마린까지 길을 복구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어 둡니다. 안드레아스, 로트게리우스, 알비투스, 포르투스, 아르날두스, 스테파누스. 그리고 우라카 여왕 때 무너진 미뇨강 다리를 다시 놓은 페트루스입니다.
12세기 안내서가 도로 보수 인부들의 이름을 후대에 남긴 겁니다. 중세의 순례길도 저절로 굴러가지 않았습니다. 왕실과 수도원이 다리와 병원과 숙소를 깔았고, 누군가는 무너진 구간을 다시 이었고, 안내서가 그 정보를 실어 날랐습니다. 지금 순례자들이 걷는 프랑스 길은 바로 이 5권이 서술한 노선입니다.
그러면 발리냐가 한 일도 다르게 읽힙니다. 그는 없던 전통을 지어낸 사람이 아니라, 800년 동안 이어져 온 정비와 표시의 계보에 이름을 하나 더 얹은 사람입니다. 다만 그의 도구가 다리와 병원이 아니라 페인트 통이었을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산티아고 밖에서도 씁니다. 끊긴 적 없어 보이는 전통은 대개 한 번은 끊겼고, 누군가 다시 표시해 놓았습니다. 지역 축제의 '몇백 년 전통'이든 노포의 '원조' 간판이든 국가의 기념일이든, 연속성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표시되는 것입니다. 표시가 누구 손으로 언제 다시 칠해졌는지를 물으면 대개 답이 나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길에서 벌어지는 일
이제 문제는 반대쪽에서 생깁니다.
외국인 순례자가 스페인인을 앞선 것은 2023년부터입니다. 지난해에는 외국인이 302,460명으로 57퍼센트를 차지했고, 스페인인은 228,527명이었습니다. 국적별로는 미국인이 43,964명으로 스페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고, 1년 사이 15퍼센트 넘게 늘었습니다.
동선도 한곳으로 몰립니다. 증명서를 받으려면 최소 100킬로미터를 걸어야 합니다. 2025년 2월까지는 그 100킬로미터가 산티아고로 이어지는 마지막 구간이어야 했습니다. 프랑스 길에서 그 선을 갓 넘는 마을이 사리아입니다. 지난해 전체 순례자의 30.5퍼센트에 해당하는 162,076명이 이 한 마을에서 출발했습니다. 규칙 한 줄이 수십만 명의 첫걸음 위치를 정했습니다. 규칙은 그 뒤 완화됐지만 쏠림은 그대로입니다.
도착지도 몸살을 앓습니다. AP통신은 지난해 산티아고 구시가지 주민들이 방문객을 위한 예절 안내문을 여러 언어로 만들어 붙였다고 전했습니다. 등산 스틱 끝에 보호캡을 씌워 달라는 부탁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구시가지 주민회장 로베르토 알무이냐는 관광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압력이 감당할 선을 넘었을 때 거부감이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그 구시가지에는 철물점도 신문 가판대도 남지 않았고 빵집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적은 숫자도 실제보다 적습니다. 순례자 사무소는 산티아고에서 증명서를 신청한 사람만 셀 수 있습니다. 갈리시아 자치정부는 2024년부터 순례로 스물다섯 곳에 센서를 두고 휴대폰 신호를 익명으로 셌습니다. 증명서 기준 집계가 실제 순례자를 최대 40퍼센트까지 놓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생장 사무소가 지난해 창구에서 센 순례자는 54,115명인데, 산티아고 사무소가 집계한 생장 출발자는 30,345명입니다.
압력은 앞으로 더 커집니다. 오는 12월 31일 대성당의 성문이 열리고 2027년이 성년으로 시작됩니다.
- 피레네 (생장~론세스바예스)첫 구간이자 가장 가파른 구간입니다.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루트는 적설기에 통제되는 때가 있어, 겨울에는 낮은 발카를로스 쪽으로 우회합니다.
- 메세타 (부르고스~레온)해발 800미터가 넘는 건조한 고원입니다. 한여름 낮에는 30도를 예사로 넘고 그늘이 거의 없습니다. 순례자들이 새벽에 걷는 구간이 여기입니다.
- 갈리시아 (오세브레이로~산티아고)대서양의 영향을 받아 1년 내내 비가 잦습니다. 최근 30년 평균으로 산티아고는 가장 비가 많은 11월에 열아홉 날, 가장 적은 7월에도 아홉 날 비가 옵니다.
- 콤포스텔라와 100킬로미터증명서를 받으려면 도보 100킬로미터 또는 자전거 200킬로미터 이상을 걸어야 합니다. 2025년 2월 개정으로 그 100킬로미터가 마지막 구간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공인 노선의 어느 연속 100킬로미터든 인정되고, 마지막 구간이 대성당으로 이어지면 됩니다. 대신 도장을 하루 두 개 받아야 합니다.
- 크레덴시알순례자 여권입니다. 지나는 숙소와 성당에서 도장을 받아 걸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발리냐가 화살표를 그리기 전까지는 존재감이 거의 없던 문서입니다.
- 성년은 달력이 정한다7월 25일이 일요일인 해가 성년입니다. 윤년 때문에 6년, 5년, 6년, 11년이라는 불규칙한 주기가 생기고 한 세기에 열네 번쯤 돌아옵니다. 올해 7월 25일은 토요일이라 성년이 아니고, 다음은 2027년입니다.
- 한국인 순례자순례자 사무소 통계로 2004년에 15명이던 한국인은 2019년에 8천 명을 넘었습니다. 그 사이 2018년 JTBC 「같이 걸을까」와 2019년 tvN 「스페인 하숙」이 방영됐습니다. 2023년에는 7,563명으로 국가별 9위였고, 아시아에서는 2위 대만(2,513명)과 격차가 큽니다.
발리냐가 페인트를 산 1984년에도 길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없던 것은 화살표였습니다. 무엇이 잊혔다고 할 때 먼저 지워진 쪽은 대개 표시입니다. 표시는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 갈리시아 자치정부 산티아고 순례길 공식 — 노란 화살표와 엘리아스 발리냐
-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 산티아고 순례길 등재 정보(1993)
- 유럽평의회 — 산티아고 순례길 문화의 길 문서
- 1987년 제1호 유럽 문화의 길 지정 30주년 기획 — 호세 안토니오 오르티스 인터뷰
- 가톨릭신문 — 성 야고보 축일과 한국인 순례자 통계
- 순례자 사무소(Oficina de Acogida al Peregrino) 연도별 통계 (링크 미확인)
- 구간별 거리·표고는 치체로네(Cicerone)·카미노웨이스 노선 자료 (링크 미확인)
- 2023·2024년 순례자 국적 통계는 하코베아 재단(Fundación Jacobea) 연간 보고 (링크 미확인)
- 2025년 콤포스텔라 규정 개정 및 센서 기반 과소 집계 추정은 순례자 사무소 고지와 American Pilgrims on the Camino 정리 (링크 미확인)
- 갈리시아 강수일수는 30년 평균 기반 기후 데이터 정리 자료. AEMET 원자료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링크 미확인)
- AP통신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과잉관광 보도, 2025년 (링크 미확인)
- 『칼릭스티누스 고사본』 5권 영역 발췌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해설 (링크 미확인)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