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70년의 수에즈 — 물길을 점령한 나라가 먼저 손을 들었다 — Woody Magazine, 2026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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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26일 (일)

인문학

오늘로 70년의 수에즈 — 물길을 점령한 나라가 먼저 손을 들었다

1956년 7월 26일,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가져갔습니다. 석 달 뒤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이 되찾으러 쳐들어가 전장에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영국은 상륙한 바로 그날 휴전을 받아들였습니다. 무엇이 이긴 쪽을 물러세웠을까요.

이번 주 세계는 다시 좁은 물길을 세고 있습니다. 지난 20일 예멘의 후티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해상 봉쇄를 선언했습니다. 후티가 장악한 지역은 홍해 남쪽 끝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따라 이어집니다. 로이즈 리스트 인텔리전스 집계를 보면 호르무즈 해협 통항은 7월 13일부터 한 주 동안 78회에 그쳐 직전 주 174회에서 반 넘게 줄었고,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었습니다.

어느 좁은 물길을 누가 쥐느냐가 다시 지도 위의 문제가 됐습니다.

정확히 70년 전 오늘, 한 남자가 그런 물길 하나를 가져갔습니다. 석 달 뒤 세 나라가 되찾으러 쳐들어갔고, 전장에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

왜 이긴 쪽이 먼저 물러났을까요.

1. 한 남자가 물길을 가져갔다

1956년 7월 26일 저녁,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라디오 연설을 했습니다. 수에즈운하회사를 국유화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고 즉시 발효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가 연설하는 동안 이집트 관리들이 회사 경영권을 접수하고 있었습니다.

운하는 1869년에 열렸고, 그 뒤 87년 동안 민간 회사가 운영했습니다. 1956년에는 그 회사 주식이 대부분 영국과 프랑스 손에 있었고, 최대 주주는 영국 정부였습니다. 유럽은 중동 석유를 이 물길로 실어 왔습니다.

런던과 파리는 강도를 만난 것처럼 반응했습니다. 법률가들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국유화 직후 미 국무부 법률고문이 쓴 각서가 지금도 국무부 사료집에 남아 있습니다. 수에즈운하회사는 이집트 법에 따라 설립되고 등록된 이집트 회사다. 운하 이용권 협정은 이집트 정부와 그 회사가 맺은 계약이다. 각서의 요지가 그랬습니다. 보상도 나세르가 먼저 꺼냈습니다. 이집트 수에즈운하청이 지금도 공개하는 포고문 원문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주주는 법 시행 전날 파리 증권거래소 종가에 따라 보상받는다.

그리고 나세르는 운하를 막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대목을 반대로 기억합니다.

9월 13일, 유럽인 도선사들이 옛 고용주의 지시를 받고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국제 관리가 없으면 운하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시도였습니다. 이집트 수에즈운하청은 그달 안에 3분의 2가 빠져나갔다고 기록합니다.

이집트는 자국 도선사를 투입해 운하를 계속 열어 두었습니다. 10월이 되자 유럽의 도움 없이도 운하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굴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증명했습니다.

배가 계속 다니는 한 개입할 명분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명분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 파리 근교 세브르에서 영국·프랑스·이스라엘 대표가 비밀리에 만났습니다. 여기서 나온 문서가 세브르 의정서입니다. 순서까지 미리 정했습니다.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시나이를 침공한다. 이튿날 영국과 프랑스가 양측에 운하에서 10마일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던진다. 이집트가 거부하면 10월 31일부터 작전에 들어간다.

이집트가 받아들일 리 없다는 것을 세 나라 모두 알았습니다. 최후통첩은 이집트를 향한 요구가 아니라 세계를 향한 알리바이였습니다.

국유화는 계기였습니다. 전쟁을 고른 쪽은 런던과 파리였습니다.

2. 여드레 만에, 이긴 쪽이 손을 들었다

각본대로 움직였습니다.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이 시나이로 들어갔습니다. 10월 31일 영국과 프랑스 공군이 이집트 비행장을 때렸습니다. 11월 5일 영국 낙하산 3대대가 엘 가밀 비행장을, 프랑스 공수부대가 포트푸아드를 잡았습니다. 이튿날 새벽 4시 30분 상륙이 시작됐습니다. 왕립해병대 일부는 헬기를 타고 들어갔습니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은 이 전술이 이때 처음 쓰였다고 기록합니다.

이집트군은 버티지 못했습니다. 시나이가 무너졌고 포트사이드가 넘어갔습니다.

다만 그들이 손에 넣은 목표물은 이미 쓸모가 없었습니다. 이집트가 배를 가라앉혀 항로를 막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운하는 이듬해 4월까지 닫혔고, 영국은 연료가 모자라 그해 12월 휘발유 배급제를 시작해 이듬해 5월까지 유지했습니다. 쳐들어간 쪽이 제 기름줄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상륙한 바로 그날, 영국 총리 앤서니 이든이 휴전을 받아들였습니다. 11월 6일에서 7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총성이 멎었습니다.

전장에서 밀려난 게 아니었습니다. 먼저 그만둔 쪽이 영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나이로 들어간 날부터 세어 여드레였습니다.

3. 흔한 답 두 개

이 대목을 설명하는 익숙한 답이 둘 있습니다.

첫째는 국제 여론입니다. 11월 2일 유엔 총회가 즉각 휴전과 병력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 997호를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습니다.

둘째는 소련입니다. 사흘 뒤인 11월 5일, 소련 각료회의 의장 니콜라이 불가닌이 이든과 몰레와 벤구리온에게 각각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집트 침공을 멈추기 위해서라면 현대적 파괴 무기를 모두 동원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로켓으로 런던과 파리를 치겠다는 위협으로 읽혔고, 당시 사람들은 이 협박이 휴전을 강제했다고 널리 믿었습니다.

둘 다 사실입니다. 그런데 둘 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유엔 결의에는 강제력이 없습니다. 결의는 요구할 뿐 집행하지 못합니다.

소련 쪽은 날짜를 더 붙여 봐야 합니다. 서한이 나가기 하루 전인 11월 4일, 소련 전차가 부다페스트로 다시 들어가 헝가리 봉기를 짓밟았습니다. 그리고 불가닌은 서한을 보낸 바로 그날 아이젠하워에게도 편지를 썼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함께 무력을 동원해 영국과 프랑스의 침공을 막자는 제안이었고, 미국은 거절했습니다. 하루 사이에 진압과 규탄이 이어졌고, 같은 날 협박과 동업 제안이 같은 손에서 나갔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따로 있습니다. 세 나라가 똑같은 협박을 받고 똑같은 비난을 받았는데, 물러난 속도가 서로 달랐습니다. 영국은 상륙 당일 물러섰습니다. 프랑스는 계속하기를 원했고, 휴전을 밀어붙인 쪽은 런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를 이듬해 3월까지 붙들었습니다. 같은 비난을 넉 달 더 견뎠습니다.

협박과 여론이 원인이라면, 왜 영국만 그 속도였을까요.

4. 흑자를 내던 나라가 무너진 자리

영국의 문제는 가난이 아니었습니다.

1956년 영국 경상수지는 흑자였습니다. 상반기에 1억 5,900만 파운드 흑자를 냈고, 연간으로는 2억 4,500만 파운드로 전년보다 오히려 좋았습니다. 무역은 멀쩡했습니다.

무너진 곳은 다른 칸이었습니다. 파운드는 1949년에 정한 1파운드 2.80달러에 고정돼 있었고, 시장은 영란은행이 그 환율을 포기하리라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매도가 몰렸고 영란은행은 달러를 팔아 환율을 방어했습니다.

영국은 스스로 만든 규칙 하나에 발목이 잡혀 있었습니다. 보유고 하한선 20억 달러. 재무부는 그 아래로 내려가면 시장이 평가절하 신호로 읽으리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수치를 매달 공표했습니다. 세계가 다달이 영국의 잔고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2억 7,900만 달러 1956년 11월 한 달 동안 영국이 잃은 순 보유고. 이 손실로 20억 달러 바닥이 뚫렸고, 재무장관 해럴드 맥밀런은 12월 4일 하원에서 그 수치를 공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평가절하하고 버티면 되지 않았을까요.

영란은행 총재 캐머런 코볼드의 판단이 그 길을 막았습니다. 평가절하하면 파운드 지역이 해체되고 영연방까지 흩어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맥밀런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영국에 파운드는 화폐가 아니라 제국의 마지막 형태였습니다. 파운드 지역이 하나의 결제권으로 묶여 있는 한 영국은 여전히 중심이었습니다. 그 환율을 놓는 순간 남은 것마저 흩어집니다. 통화를 지키는 쪽과 전쟁을 이어 가는 쪽 가운데, 영국은 통화를 골랐습니다.

국제통화기금 공식 역사가는 이 대목을 이렇게 짚습니다. 평가절하나 변동환율이 선택지였다면 영국은 외부 압력을 견디면서 군사작전을 끝낼 수 있었으리라는 것입니다.

은행은 금고가 비어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창구로 몰려서 무너집니다. 1956년 영국은 흑자를 내는 은행이었습니다. 세계의 은행 노릇을 하던 곳도, 뱅크런에 노출된 곳도 세 나라 가운데 영국뿐이었습니다.

5. 달러가 있어야 파운드를 지킨다

고리 하나를 먼저 풀어야 합니다. 영국의 운명이 왜 워싱턴에 걸려 있었는가입니다.

환율을 방어한다는 말은 시장에 쏟아지는 파운드를 정부가 사들인다는 뜻입니다. 사들이려면 달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영국의 달러가 바닥을 향해 줄고 있었습니다.

달러를 더 구할 곳은 국제통화기금이었습니다. 회원국은 자기 몫만큼 기금에서 달러를 꺼내 쓸 수 있습니다. 다만 꺼내려면 이사회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기금에서 가장 큰 지분과 가장 많은 표를 쥔 나라가 미국이었습니다.

영국 재무부는 미국 없이 밀어붙일 수 있는지 미리 표를 세어 봤습니다. 유럽 이사 일곱과 호주, 캐나다는 찬성으로 보았습니다. 미국과 이집트, 그리고 중남미 셋은 반대로 보았습니다. 남은 중국·인도·일본 셋을 모두 기권시켜야 겨우 통과인데,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파운드를 지킬 열쇠는 워싱턴 손에 있었습니다. 추정이 아니라 재무부가 직접 계산해서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6. 11월 6일, 내각회의실

맥밀런은 미국이 도우리라 믿었습니다. 9월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 연차총회에서 미 재무장관 조지 험프리를 따로 만났고, 확답은 못 받았지만 11월 대선이 끝나면 어떤 형태로든 지원이 오리라 여겼습니다.

오지 않았습니다.

맥밀런은 회고록에서 인정합니다. 11월 6일 내각회의 도중, 휴전에 동의하기 전에는 미국이 기금 인출을 지원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요. 그날 저녁 이든이 휴전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휴전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미국이 요구한 것은 유엔 결의 전면 이행, 곧 즉각적인 전면 철수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두 번째 밸브도 잠겼습니다. 운하가 막히고 시리아가 송유관을 끊자 유럽은 미국 석유가 필요해졌습니다. 미국 정부에는 중동비상위원회가 마련해 둔 유럽 석유 공급 계획이 있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휴전이 실제로 발효됐다는 확인이 있을 때까지 미국 정부가 석유 문제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것이 철수를 강요하는 압박이라고 항의했습니다. 그 계획은 11월 30일에야 승인이 났습니다.

11월이 끝나 갈 무렵, 맥밀런이 험프리와 면담을 잡지 못해 주미대사와 기금 이사를 통해 뜻을 전했습니다. 험프리의 답은 짧았습니다. 영국이 유엔에 맞서는 대신 따를 때 지원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출 창구와 기름 수도꼭지가 동시에 잠긴 채, 나가라는 요구만 남았습니다.

영국 내각이 굴복했습니다. 12월 22일을 전면 철수 시한으로 정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대사와 이사를 험프리에게 보내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12월 3일, 험프리가 갑자기 태도를 바꿉니다. 빌릴 수 있는 최대치를 전부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시장에 파운드가 확실히 지켜진다는 인상을 주려면 액수가 커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즉시 인출 5억 6,150만 달러에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약정 7억 3,850만 달러를 더해 13억 달러. 영국이 기금에서 빌릴 수 있는 한도의 100퍼센트였습니다. 당시 기금 역사상 최대 규모였고, 직전 최대 기록은 그해 10월 프랑스에 약정한 2억 6,250만 달러였습니다.

통과 과정도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기금 규약은 대규모 자본 유출을 메우는 대출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영국이 겪은 일이 정확히 그 자본 유출이었습니다. 신임 총재 페르 야콥손이 논리를 늘려 안건을 올렸고, 실무 보고서는 이번 자금이 경상계정이 아니라 자본계정에 필요하다고 명시했습니다. 규정보다 결정이 먼저였습니다.

이튿날 맥밀런은 11월 손실을 하원에 공개하면서 이 대책을 함께 발표했습니다. 수출입은행 5억 달러 차관은 12월 21일 발표됐고, 집행은 이듬해 3월이었습니다.

정작 영국은 약정분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즉시 인출분은 가져갔지만, 필요할 때 꺼내 쓰기로 한 7억 3,850만 달러는 끝내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험프리는 그 돈에 손을 대는 순간 신뢰가 깨진다고 못 박았고, 실제로 손댈 일도 없었습니다. 발표만으로 유출이 멎었고, 보유고는 이후 몇 달 동안 20억 달러 위에서 움직였습니다.

무기는 돈이 아니라 숫자였습니다.

항복이 먼저였고, 돈이 나중이었습니다.

맥밀런은 죽을 때까지 돈 때문에 물러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 공식 역사가는 방대한 증거 어디에도 그럴듯한 대안 설명이 없다고 결론짓습니다. 다만 이든 전기를 쓴 로버트 로즈 제임스는 재정 요인을 결정적이라고 하되 유일한 요인은 아니라고 적었습니다. 결정적이되 유일하지는 않았다. 이 선이 정확합니다.

7. 지도와 장부

나세르는 전장에서 졌습니다. 그리고 운하를 지켰고, 국유화를 관철했고, 아랍 민족주의의 상징이 됐습니다.

네 교전국이 모두 국제통화기금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홉 달 동안 8억 5,800만 달러가 나갔고, 여기에 7억 3,800만 달러가 약정으로 잡혔습니다. 영국의 인출 안건이 이사회에 올랐을 때, 이집트는 반대하는 대신 기권했습니다.

이스라엘 건도 같은 방에서 처리됐습니다. 기금 이사회가 이스라엘의 환율을 승인한 때는 1957년 3월 중순, 시나이 철수 일주일 뒤였습니다. 환율 승인은 인출의 전제 조건이었고, 실제 인출은 그해 5월이었습니다. 3월 환율 표결에서도 5월 인출 표결에서도 이집트는 기권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 공식 역사가는 1956년 파운드 공격을 전후 최초의 대형 금융 위기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놀랄 만큼 현대적이라고 씁니다. 1995년 멕시코 위기를 두고 기금 총재가 21세기 최초의 금융 위기라 불렀지만, 새로워 보였던 요소는 사실상 40년 전 수에즈에 전부 있었다는 것입니다.

1956년이 남긴 것은 운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가 물길을 세고 있을 때 실제로 숨통을 쥔 손은 다른 방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영국은 지도를 보고 움직였고, 미국은 장부를 보고 움직였습니다.

마지막 한마디

영국은 운하를 되찾으러 갔다가 파운드를 잃었다. 흑자를 내던 나라가 무너진 자리는 전선이 아니라 장부였다. 그 장부의 열쇠는 한 발도 쏘지 않은 나라가 쥐고 있었다. 목을 조를 자리는 지도 위에 없었다.

그 뒤

  • 1956년 12월 22일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이집트에서 철수를 마쳤습니다.
  • 1957년 1월 이든이 사임하고 맥밀런이 총리가 됐습니다. 맥밀런은 뒷날 미 국무장관 덜레스에게, 영국의 이번 행동은 쇠퇴하는 강대국의 마지막 숨이었다고 말했습니다.
  • 1957년 3월 이스라엘이 시나이에서 물러났습니다. 다만 아카바만 통항권을 얻었고, 유엔 긴급군이 이집트 쪽 국경에 배치됐습니다.
  • 1957년 4월 운하가 이집트 관리 아래 다시 열렸습니다. 운영권은 그 뒤로 이집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이 운하를 다시 막았고, 배가 다시 다닌 것은 1975년입니다.
  • 1958년 보상금이 정리됐습니다. 아랍연합공화국 정부가 이집트파운드 2,830만 파운드를 지급하고, 회사는 이집트 밖 자산을, 이집트는 자국 내 자산을 갖기로 했습니다. 옛 주주들은 지분 대신 수표를 받았습니다.
  • 1967년 영국이 파운드를 2.80달러에서 2.40달러로 평가절하했습니다. 전쟁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킨 환율을 11년 뒤에 놓았습니다.

출처·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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