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년 전 오늘 루브르에서 모나리자가 사라졌습니다 — 일주일 뒤 사람들은 빈 벽을 보려고 줄을 섰습니다 — Woody Magazine, 2026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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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2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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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년 전 오늘 루브르에서 모나리자가 사라졌습니다 — 일주일 뒤 사람들은 빈 벽을 보려고 줄을 섰습니다

세 줄 요약

  • 1911년 8월 21일 루브르 휴관일, 유리공 빈첸초 페루자가 모나리자를 외투 속에 넣고 걸어 나갔습니다. 그 그림에 보호 유리를 끼운 사람입니다. 박물관은 다음 날 오전까지 몰랐습니다.
  • 그림은 28개월 동안 파리 하숙방 트렁크 바닥에 있었습니다. 그동안 신문은 거듭 그 얼굴을 찍어 냈고, 다시 문을 연 루브르에는 빈 벽을 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 1907년 여행안내서가 두 문장으로 넘긴 그림은 1914년 1월 돌아온 뒤 이틀 만에 10만 명을 불렀습니다.

오늘 루브르에 가면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루브르를 찾는 사람 열에 여덟이 모나리자를 보러 온다고 합니다(스미스소니언 매거진, 2026년 4월). 방에 들어서면 그림보다 휴대전화를 든 팔이 먼저 보입니다. 정작 그림은 멀리 유리 뒤에 우표만 합니다. 그래도 다들 그 앞에 섭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니까요.

그럴 만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렸고, 500년이 넘었고, 그 미소를 두고 책이 수백 권 나왔습니다. 이만한 그림이면 처음부터 이랬겠거니 하고 넘어가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1907년에 나온 베데커 파리 여행안내서는 이 그림에 두 문장을 썼습니다. 같은 책 1878년판은 한 문단이었습니다. 오히려 줄었습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나 밀로의 비너스는 그보다 훨씬 길게 다뤘습니다. 당시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는 르네상스 전시실에 걸린 여러 그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그림이 어떻게 4년 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됐는지를 우리는 대개 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도난.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도둑맞은 그림은 많습니다. 2010년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에서 도둑이 피카소와 마티스를 하룻밤에 들고 나갔습니다. 그 그림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모나리자를 바꿔 놓은 건 도둑맞았다는 사실 자체라기보다, 그 뒤에 이어진 28개월이었습니다.

유리를 끼우러 온 사람

1911년 8월 21일 월요일 아침, 루브르는 휴관일이었습니다. 빈첸초 페루자라는 스물아홉 살 이탈리아 남자가 흰 작업복을 입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숨어든 게 아닙니다. 루브르와 계약한 유리 업체의 직원이었습니다. 몇 달 전까지 주요 그림에 보호 유리를 끼우러 이 건물을 드나들었습니다. 그 무렵 루브르에서는 그림을 칼로 긋는 사건이 잇따랐고 모나리자를 노린다는 협박 편지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박물관이 그림 앞에 유리를 세웠습니다. 그 유리를 끼운 손 가운데 하나가 페루자의 손이었습니다.

그는 살롱 카레로 걸어가 그림을 벽에서 내렸습니다. 포플러 나무판에 그린 77×53cm짜리 그림이니 무게는 몇 kg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계단참에서 유리와 액자를 떼어 내고 그림만 작업복 속에 넣은 뒤, 아침의 루브르를 걸어서 나왔습니다.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습니다. 흰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휴관일 아침에 복도를 지나가는 건 이 건물에서 흔한 풍경이었으니까요.

박물관은 다음 날 오전까지 몰랐습니다. 화요일 아침 루이 베루라는 화가가 살롱 카레를 그리려고 이젤을 들고 왔습니다. 벽에는 쇠고리 네 개만 남아 있었습니다. 경비원에게 물었더니 "사진 찍으러 가져갔을 겁니다"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루브르는 그림을 벽에서 떼어 사진실로 보내는 일이 잦았고, 그럴 때마다 일일이 알리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 뒤 사진실에도 그림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에야 경찰이 들어왔습니다. 그림이 사라진 지 하루가 넘은 뒤였습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우리가 한 번 멈춰 볼 대목입니다. 그림이 하루 넘게 없어도 아무도 모르는 곳. 그게 1911년의 루브르였습니다.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에 따르면 당시 루브르는 방이 1,000개가 넘는 세계 최대 건물이었습니다. 소장품 25만 점을 150명이 안 되는 경비원이 지켰습니다. 도난 한 해 전에는 이집트 여신상이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페루자가 대담했다기보다 건물이 그랬습니다. 그림 한 점쯤 들고 나가기 쉬웠습니다.

전단이 붙기 시작했다

루브르는 일주일 동안 문을 닫았습니다. 경찰 60명이 건물을 뒤졌고, 유리에 남은 지문 하나를 직원 257명의 기록과 대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주일 사이에 모나리자는 신문 1면으로 옮겨 갔습니다. 파리만이 아니었습니다. 세계 곳곳의 신문이 같은 얼굴을 실었습니다. 잡지 『릴뤼스트라시옹』은 그림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4만 프랑을 걸었습니다. 루브르 친구들 협회는 2만 5,000프랑을 따로 걸었습니다. 거리에는 그림을 찾는다는 벽보가 붙었습니다.

사람이 사라지면 동네에 전단이 붙습니다. 그 사람이 있을 때는 지나치던 이웃들이 전단을 보고 처음으로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이름을 외우고, 눈매를 외우고, 어디서 본 것 같다고 말합니다. 1911년 가을 모나리자에게 일어난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림이 그려진 뒤 400년 동안보다 사라진 몇 주 동안 더 많은 사람이 그 얼굴을 봤습니다. 원본이 아니라 신문에 찍힌 얼굴을요.

재개관한 루브르에는 줄이 늘어섰습니다. 사람들이 보려고 온 건 그림이 아니라 그림이 걸렸던 자리였습니다. 쇠고리 네 개가 박힌 빈 벽 앞에 사람들이 섰습니다. 그중에 프라하에서 온 젊은 보험회사 직원도 있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친구 막스 브로트와 그 벽을 봤습니다. 저녁에는 이 도난을 웃음거리로 만든 보드빌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엽서가 나왔고, 샹송이 나왔고, 짧은 영화가 나왔습니다. 그림 한 점의 부재가 그해 파리의 오락거리였습니다.

사람들이 보려고 온 건 그림이 아니라 그림이 걸렸던 자리였습니다.

경찰은 엉뚱한 사람을 잡았다

수사는 화려하게 헛돌았습니다. 경찰은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며칠 가뒀고 화가 파블로 피카소를 불러 심문했습니다. 아폴리네르의 전직 비서가 몇 해 전 루브르에서 이베리아 조각상을 훔쳐 피카소에게 판 일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모두 모나리자와는 무관했습니다. 그사이 진짜 그림은 루브르에서 멀지 않은 10구의 하숙방, 나무 트렁크의 이중 바닥 아래에 있었습니다.

경찰이 페루자를 안 만난 것도 아닙니다. 루브르를 드나든 사람을 전부 조사하는 과정에서 형사가 그의 방까지 갔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방이 너무 허름했습니다. 이런 데 사는 노동자가 그런 일을 벌였을 리 없다고 보고 형사는 방을 뒤지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그 방 안에 그림이 있었습니다. 페루자는 도난 소식을 신문에서 봤다고 진술했고, 그날 출근이 늦은 건 전날 과음 때문이라고 둘러댔습니다. 경찰은 그 말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28개월이 지났습니다. 1913년 12월, 페루자는 트렁크를 들고 기차로 피렌체에 갔습니다. 골동품상 알프레도 제리에게 '레오나르도'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보낸 뒤였습니다. 다빈치의 그림이 프랑스에 있는 건 치욕이니 이탈리아로 돌려주겠다, 대신 50만 리라를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제리는 우피치 미술관장 조반니 포지를 불렀습니다. 두 사람은 호텔 방 침대 위에 놓인 그림을 보고 우피치로 옮겼습니다. 뒷면 표식과 물감 균열을 루브르 사진과 대조한 뒤 경찰에 알렸습니다. 12월 11일 페루자는 그 호텔에서 붙잡혔습니다.

재판에서 그는 애국심을 내세웠습니다. 나폴레옹이 약탈해 간 그림을 되찾아온 것이라고요. 그런데 모나리자는 나폴레옹과 무관합니다. 다빈치 본인이 1516년 프랑스로 올 때 들고 왔고, 프랑수아 1세가 값을 치르고 샀습니다. 페루자는 1년 남짓을 선고받고 1년을 채우지 않고 나왔습니다. 이탈리아 신문 일부는 그를 영웅처럼 썼습니다. 그림은 피렌체, 로마, 밀라노 순회 전시를 마치고 1914년 1월 4일 루브르로 돌아왔습니다.

10만 명
1914년 1월 루브르에 다시 걸린 뒤 이틀 동안 모나리자를 보러 온 사람 (스미스소니언 매거진)

돌아온 그림, 떼지 않은 전단

돌아온 첫 이틀 동안 10만 명이 왔습니다. 1907년 안내서가 두 문장으로 넘긴 그림 앞에요. 이 숫자가 말해 주는 건 그림이 더 좋아졌다는 게 아닙니다. 그림은 28개월 동안 트렁크 안에 있었습니다. 붓질 하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그 얼굴을 알고 있었습니다. 신문에서, 엽서에서, 현상금 벽보에서 2년 넘게 본 얼굴을 이제 실물로 확인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돌아오면 전단은 떼지만, 전단을 보며 외운 얼굴은 남습니다.

이쯤에서 반론이 나올 법합니다. 원래부터 유명했으니까 유리를 끼운 것 아니냐고요.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루브르가 1910년에 유리를 끼운 그림은 모나리자만이 아닙니다. 주요 그림 여러 점이었고, 이유는 칼과 협박이었습니다. 그 시절 사람들은 걸작을 보러 루브르에 갔지 모나리자를 보러 가지 않았습니다. 1860년대부터 평론가 몇몇이 이 그림을 르네상스 최고작으로 추켜올리긴 했습니다. 그 평가는 아직 안내서 두 문장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 한국어 기사에서 자주 보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사기꾼 발피에르노가 페루자를 시켜 그림을 훔치게 했다, 그 틈에 위작 여섯 점을 부호들에게 팔았다는 줄거리입니다. 근사한 이야기입니다. 출처는 하나뿐입니다. 1932년 미국 잡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칼 데커라는 기자가 쓴 기사입니다. 그 뒤로 어떤 기록도 발피에르노라는 인물의 존재를 뒷받침하지 못했습니다.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은 이 설을 "뒷받침할 사료가 없다"고 정리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1911년 사건 자체보다 더 자주 되풀이합니다. 사람들은 빈 자리를 이야기로 채우기 마련이고, 그게 이 그림에 일어난 일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다시, 빈 벽 앞에서

그러니까 순서를 이렇게 놓아 보면 어떨까요. 루브르는 그림을 지키려고 유리 업체를 불렀습니다. 그 업체의 직원이 그림을 들고 나갔습니다. 건물이 너무 커서 하루 넘게 아무도 몰랐습니다. 신문이 그 얼굴을 세계에 뿌렸습니다. 사람들은 그림이 없는 벽을 보러 줄을 섰고, 없는 동안 그 얼굴을 외웠습니다. 그림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이미 아는 얼굴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이 순서 어디에도 다빈치의 붓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유명하다고 부르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뜻밖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걸려 있는 그림은 지나칩니다. 사라진 그림은 날마다 찾습니다. 올봄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다음 뮤지컬 소재로 고른 것도 1911년의 이 도난이었습니다. 작년 10월 루브르에서 왕실 보석이 털렸을 때 세계 언론이 꺼내 든 이야기도 이것이었습니다. 115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이 그림을 두고 가장 자주 꺼내는 이야기는 그림이 없던 2년입니다.

다빈치는 그림을 그렸고, 페루자는 그림을 가져갔습니다. 그림을 유명하게 만든 건 그 사이의 28개월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림 앞에서 그 얼굴을 외운 게 아닙니다. 없는 동안 외웠습니다.

출처·참고

Woody Magazine은 편집장 Woody가 기획·편집·발행합니다. 기사 제작 과정에 Claude AI를 도구로 활용하며, 편집 판단과 최종 책임은 편집부에 있습니다. 독자의 교차 검증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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