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예방주간은 시카고 날짜입니다 — 소식은 시카고가 먼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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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8일 (목)

인문학

화재예방주간은 시카고 날짜입니다 — 그 밤 그린베이엔 시카고 소식이 먼저 왔습니다

155년 전 같은 밤, 위스콘신 숲속 벌목 마을이 통째로 불탔습니다. 그 소식은 이튿날 밤 배를 타고 나왔습니다.

세 줄 요약

  1. 미국 화재예방주간은 1871년 10월 8일 밤 시작된 시카고 대화재를 기려, 해마다 10월 9일이 낀 주에 엽니다. 올해는 10월 4일부터 10일까지입니다.
  2. 같은 밤 북쪽 위스콘신의 벌목 마을 페슈티고 일대에서는 적게 잡아도 시카고의 네 배인 1,200명이 숨졌습니다.
  3. 페슈티고는 전신선이 불타 소식을 내보내지 못했습니다. 이튿날 밤 배가 소식을 싣고 나갔을 때, 신문과 구호품은 이미 시카고로 가 있었습니다.

이번 주 미국은 화재예방주간입니다. 날짜를 고른 이유가 있습니다. 1871년 10월 8일 밤 시작된 시카고 대화재를 기리려고, 해마다 10월 9일이 낀 한 주를 이 행사에 씁니다. 1911년 대화재 40주년에 '화재예방의 날'로 시작했고, 1925년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 전국 행사로 선포했습니다. 올해는 10월 4일부터 10일까지입니다.

시카고를 고른 건 그럴 만합니다. 불은 이틀 동안 도심을 태웠습니다. 건물 1만 7,000채 넘게 사라졌습니다. 시민 약 10만 명이 집을 잃었고, 약 300명이 숨졌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화재라는 말이 과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같은 밤, 시카고에서 북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위스콘신 숲에서는 훨씬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미국 국립기상청은 사망자를 1,200명에서 2,400명 사이로 추정하고, 이 불을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화재로 꼽습니다. 적게 잡아도 시카고의 네 배입니다. 그런데도 이름은 낯섭니다. 페슈티고 화재입니다.

우리는 보통 큰 재난일수록 오래 기억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밤 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그린베이에 들어온 소식

그린베이는 미시간호의 한 자락인 그린베이만 맨 안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날 밤 이 도시에는 소식이 차례로 들어왔습니다. 먼저 인근 마을들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다음에는 전신으로, 시카고도 불타고 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페슈티고 소식은 그 뒤에야 들어왔습니다.

페슈티고는 그린베이에서 북쪽으로 약 65km 떨어진 마을입니다. 시카고는 그보다 네 배 넘게 멀었습니다. 그런데도 먼 도시의 소식이 가까운 마을의 소식보다 먼저 닿았습니다.

관심이 쏠리는 방식은 붐비는 식당과 비슷합니다. 먼저 온 손님이 자리를 잡으면, 늦게 온 손님은 사정이 아무리 급해도 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날 밤 먼저 도착한 손님은 시카고였습니다.

숲속 벌목 마을 페슈티고

페슈티고는 페슈티고강 양쪽에 들어선 벌목 마을이었습니다. 위스콘신 역사학회는 당시 주민을 2,000명 안팎으로 봅니다. 마을에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목공품 공장이 있었습니다. 강을 타고 내려온 통나무로 양동이와 빨래통, 빗자루 자루, 빨래집게를 만들었습니다. 공장 주인은 시카고 초대 시장을 지낸 사업가 윌리엄 오그던이었습니다.

1871년은 유난히 가물었습니다. 여름 가뭄이 가을까지 이어졌고, 늪지 바닥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릴 만큼 말랐습니다. 마을 주변 숲에서는 몇 주째 크고 작은 불이 났습니다. 농부와 철도 공사장 인부들은 땅을 개간하면서 잘라 낸 나무를 쌓아 태웠습니다. 국립기상청은 가뭄에 벌목과 개간, 주민들의 무관심, 그날 들이닥친 강한 가을 폭풍이 겹쳤다고 봅니다.

10월 8일 밤, 바람이 불길을 하나로 모아 마을로 몰아왔습니다. 사람들은 강으로 뛰어들어 목까지 물에 잠긴 채 몇 시간을 버텼습니다. 강 양쪽에서 사람들이 다리로 몰려들었습니다. 다리는 불타 무너졌고, 거기서 많은 사람이 숨졌습니다. 아침이 됐을 때 마을에 남은 건물은 한 채뿐이었습니다. 마을에서만 700명에서 800명이 숨졌습니다.

"내가 강에서 나온 것은 새벽 세 시 반쯤이었다." — 그날 밤 강물 속에서 살아남은 페슈티고의 신부 피터 페르냉, 1874년 목격담

불탄 땅은 기상청 추정으로 약 150만 에이커, 서울 면적의 열 배쯤입니다. 페슈티고 말고도 마을 열여섯 곳이 함께 사라졌습니다. 오그던은 같은 밤에 시카고의 집과 사업체, 그리고 페슈티고의 공장을 모두 잃었습니다.

배를 타고 나간 소식

페슈티고를 바깥과 잇는 전신선은 한 가닥뿐이었습니다. 그 선이 전신국과 함께 불탔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웃 마을 머리네트까지 걸어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머리네트에서도 전신이 끊겨 그린베이로 소식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주민들은 불이 되살아나면 사람들을 피신시키려고 증기선을 붙잡아 두었다가, 9일 밤에야 배를 띄워 그린베이에 참상을 알렸습니다. 소식은 거기서 다시 전신을 탔습니다. 주도 매디슨에 소식이 닿은 건 10월 10일이었습니다.

하루 늦었을 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하루 사이에 관심이 갈 곳은 정해졌습니다. 신문은 시카고 기사로 채워졌습니다. 위스콘신 주지사도 구호품을 싣고 시카고로 떠났습니다. 늦게 온 손님이 식당 문을 열었을 때, 자리는 이미 차 있었습니다.

늦게 나온 소식은 숫자도 작았습니다. 현지 주간지 「머리네트 앤 페슈티고 이글」은 엿새 뒤인 14일 자 지면에도 '500명 사망'을 제목으로 걸었습니다. 당시 다른 신문의 기자는 페슈티고에서 60명이 죽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다들 과장이라고 했다고 적었습니다. 실제 사망자는 두 숫자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이름을 찾은 사람 383명

155년 전 일이니 숫자가 흐린 건 당연해 보입니다. 시카고 사망자도 어림입니다. 그런데 시카고 추정치는 200명에서 300명 사이를 오가고, 페슈티고는 1,200명에서 2,400명까지 벌어집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이 범위는 왜 이렇게 넓을까요. 숲속 농가가 통째로 흔적 없이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회사 숙소와 교회 두 곳으로 피했던 사람들, 숲속 벌목장에서 일하던 떠돌이 노동자 가운데 몇 명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383
석 달 조사 끝에 이름을 확인한 사망자 수

J. H. 리븐워스 대령은 석 달 동안 사망자를 확인했고, 그 결과가 1873년 주의회 기록에 실렸습니다. 명단에 오른 이름은 383개였습니다. 그 밖에 몇 명이 더 있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게 됐습니다. 사망자 수가 지금도 범위로 남은 이유입니다.

시카고로 가던 구호품

위스콘신 주지사 루셔스 페어차일드는 그때 위스콘신에 없었습니다. 주 정부 간부들과 함께 시카고에 구호를 도우러 가 있었습니다. 페슈티고의 구조 요청이 주도에 닿았을 때, 받은 사람은 스물네 살의 주지사 부인 프랜시스였습니다.

프랜시스는 직접 지시를 내렸습니다. 시카고로 보내려고 모아 둔 구호품을 페슈티고로 돌렸습니다. 11일 오후에는 식량과 옷을 실은 화차 한 칸이 매디슨에서 떠날 채비를 마쳤습니다. 위스콘신 역사학회에 따르면 그 뒤 매디슨에 모인 구호금은 16만 6,000달러가 넘었습니다. 늦게 온 손님에게도 결국 자리는 났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날 밤의 주인공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화재예방주간이 기리는 10월 8일 밤은 페슈티고의 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155년째 그 날짜에는 먼저 온 손님의 이름표만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주에 듣는 이름도 그쪽입니다. 기억은 사망자 수를 세지 않았습니다. 소식이 도착한 순서를 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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