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TV 방송 내일 90년 — 개국식을 두 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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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1월 1일 (일)
BBC TV 방송 내일 90년 — 개국식을 두 번 했습니다
1936년 11월 2일, BBC는 두 회사의 방식 가운데 하나를 고르지 못해 같은 행사를 두 번 생방송했습니다. 석 달 뒤 결론을 이끈 사람들은 매주 두 장비를 번갈아 쓰며 쇼를 만든 제작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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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1월 2일 월요일 오후 3시, 런던 북쪽 언덕 위 알렉산드라 궁전에서 BBC가 텔레비전 정규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체신장관과 BBC 이사회 의장이 단상에 올라 축사를 했습니다. 런던과 그 주변에서 400명 안팎이 수상기 앞에 앉아 그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그날 BBC는 개국식을 두 번 했습니다. 한 스튜디오에서 행사를 내보낸 뒤, 옆 스튜디오에서 같은 순서를 처음부터 다시 생방송했습니다. 녹화를 다시 튼 게 아닙니다. 카메라도 화면을 만드는 방식도 서로 다른 두 회사가 같은 행사를 한 번씩 맡았습니다.
먼저 나간 쪽은 베어드 텔레비전이었습니다. 1925년부터 런던에서 텔레비전을 시연해 온 스코틀랜드 발명가 존 로지 베어드의 이름을 단 회사입니다. 그런데 그날 단상에 베어드는 없었습니다. 회사를 대표해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은 회장 해리 그리어였습니다. 베어드 밑에서 일하다 BBC로 옮긴 엔지니어 토니 브리지워터는 귀빈석에 초대받지 못한 베어드가 몹시 속상해했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석 달 뒤 BBC는 베어드 방식을 접었습니다. 우리는 이 결말을 보통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기계식이라 화질이 나빴다는 것, 그리고 그해 11월 말 베어드의 연구소가 불에 탔다는 것입니다. 둘 다 그럴 만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기록을 따라가 보면 먼저 판정을 내린 사람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한 주 걸러 베어드 장비로 실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했던 BBC 제작진입니다.
한 주씩 번갈아 쓰라는 결정
BBC가 두 방식을 함께 쓴 데는 사정이 있습니다. 영국 정부는 1934년 셀즈던 경이 이끄는 위원회를 꾸려 텔레비전을 어떤 방식으로 방송할지 검토하게 했습니다. 후보는 둘이었습니다. 베어드 텔레비전의 240선 방식, 그리고 음반 회사 EMI가 무선 회사 마르코니와 손잡고 만든 마르코니-EMI의 405선 방식입니다. 이름만 보면 발명가와 대기업의 대결 같습니다. 하지만 베어드 텔레비전도 1932년부터 영화사 고몽브리티시가 주인인 회사였습니다. 베어드에게는 대표 직함만 남아 있었고 경영권은 없었습니다.
두 방식을 가르는 240과 405는 '선'의 개수입니다. 화면을 가로줄 몇 개로 나눠 그리느냐를 뜻하고, 줄이 많을수록 그림이 촘촘해집니다. BBC는 240선 이상을 '고화질'이라 불렀고, 그래서 11월 2일 방송에는 '세계 최초의 정규 고화질 방송'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정규 방송 자체는 독일이 1935년 3월 베를린에서 먼저 시작했습니다. 다만 독일 방송은 180선이었습니다. BBC 역사 페이지도 이 기준 덕분에 다른 나라를 제치고 '세계 최초'를 내세울 수 있었다고 인정합니다.
셀즈던 위원회는 1935년 초 보고서를 냈지만, 두 방식 가운데 하나를 고르지는 않았습니다. 둘 다 받아들여 한 주씩 번갈아 방송하게 했습니다. 여섯 달짜리 시험이었고, 체신부가 새로 꾸린 텔레비전 자문위원회가 이 시험을 맡았습니다. 위원장은 이번에도 셀즈던 경이었습니다.
알렉산드라 궁전에는 스튜디오가 두 개 생겼습니다. A 스튜디오는 마르코니-EMI가, B 스튜디오는 베어드가 썼습니다. 개국식을 누가 먼저 맡을지는 동전을 던져 정했고, 베어드가 이겼습니다.
시청자의 수상기도 두 방식을 모두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방식을 바꾸는 스위치가 달려 있었습니다. 값은 85~95기니, 파운드로 치면 90~100파운드였습니다.
54초 늦게 나가는 화면
흔히 패배의 이유로 꼽는 화질은 지금도 평가가 엇갈립니다. 당시 BBC 쪽 기록은 베어드 화면이 고르지 않다고 적었고, 베어드의 아들 맬컴 베어드는 화질만 보면 두 방식에 큰 차이가 없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기록마다 똑같이 짚는 차이는 따로 있습니다. 카메라입니다.
베어드 회사는 카메라를 세 종류 내놨습니다. 좁은 방에서 강한 빛으로 아나운서 얼굴을 훑는 기계식 장치, 미국 발명가 필로 판즈워스의 기술을 들여온 전자식 카메라, 그리고 '중간 필름' 방식입니다. 기계식 장치로는 상반신밖에 찍을 수 없었고, 판즈워스 카메라는 빛에 둔감했습니다. 그래서 무대 장면은 주로 중간 필름 방식이 맡았습니다.
중간 필름 방식은 영화 카메라와 현상소를 한 기계에 붙인 장치였습니다. 카메라가 장면을 17.5밀리 필름에 찍으면, 필름은 곧장 아래 탱크로 내려가 현상액과 물, 정착액을 차례로 지났습니다. 이렇게 나온 젖은 필름을 그대로 스캐너에 걸어 전기 신호로 바꿔 내보냈습니다. 카메라 앞 장면이 전파를 타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방송에서 54초는 긴 시간입니다. 스튜디오에서는 이미 다음 장면을 찍고 있는데, 화면에는 1분 가까이 지난 장면이 나갔습니다. 소리와 화면을 맞추기도 어려웠습니다. 현상 탱크와 호스가 줄줄이 달린 카메라는 바닥에 붙박여 있어 구도도 거의 바꿀 수 없었습니다. 엔지니어 J. D. 퍼시는 54초 동안 거치는 공정 어디서든 고장이 날 수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래서 아나운서들은 방송 시간 대부분을 사과하며 보냈다고 합니다.
옆 A 스튜디오의 이미트론 카메라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이미트론은 전자식이었습니다. 카메라 안에 맺힌 상을 전자 빔이 곧바로 신호로 바꿨습니다. 미국 RCA의 카메라와 원리가 같았고, 마르코니-EMI는 RCA 특허를 쓸 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필름도 현상도 거치지 않으니 지연이 없었습니다. 가벼워서 스튜디오 안을 옮겨 다닐 수 있었고, 긴 케이블을 끌고 궁전 뜰로 나가 야외 장면도 찍었습니다.
매주 쇼를 만든 사람들
시험의 목적은 어느 쪽이 나은지 가리는 데 있었습니다. 그 답을 가장 먼저 몸으로 안 사람들은 제작진이었습니다. BBC는 일요일을 뺀 매일 오후 3시와 밤 9시에 한 시간씩 방송했고, 하루 제작비는 100파운드 안팎이었습니다. 수상기 한 대 값으로 하루 두 시간을 채운 셈입니다. 제작진은 한 주는 A 스튜디오에서, 다음 주는 B 스튜디오에서 쇼를 만들었습니다.
같은 사람들이 같은 예산으로 두 장비를 번갈아 써 본 겁니다. 우리가 가게에서 두 제품을 몇 분 만져 보고 고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 주에 맡은 장비로 매일 두 시간을 채워야 했습니다. 개국일 방송을 총괄한 PD 세실 매든은 훗날 베어드 스튜디오에서 일한 경험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작진의 평가는 문서로 올라갔습니다. 텔레비전 국장 제럴드 콕은 방송을 시작하고 한 달이 채 안 돼 내부 메모를 썼습니다. 베어드 장비로는 프로그램을 효율적으로 만들기도, 보기 좋게 만들기도 어렵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언제 탈이 날지 모르는 장비 때문에 제작진은 기운이 빠졌고, 들쭉날쭉한 화면에 시청자는 실망했다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TV사 연구자 존 와이버는 BBC 수뇌부와 체신부 자문위원회가 이 보고를 무겁게 받아들였다고 설명합니다.
11월 30일 크리스털 팰리스 화재
여기서 반론이 나올 만합니다. 그해 11월 30일 밤 런던 남쪽의 크리스털 팰리스가 불탔고, 그 안에 있던 베어드 회사의 연구 시설 대부분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발명가가 불운에 무너졌다고 보면 이야기가 깔끔합니다.
그런데 크리스털 팰리스와 알렉산드라 궁전은 런던 남쪽과 북쪽에 따로 떨어진 건물이었습니다. 불은 연구소를 태웠고, 방송을 하던 B 스튜디오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베어드 방식 방송도 화재 뒤 계속 이어졌습니다. 콕이 메모에서 문제 삼은 것도 스튜디오 안의 장비였습니다. 결정 발표는 화재에서 두 달 넘게 지난 1937년 2월 5일에 나왔습니다.
발표는 조심스러웠습니다. 체신장관은 자문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405선이라는 기술 기준 하나를 쓰겠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보도들은 기술 기준을 정했을 뿐 회사를 고른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네이처』도 베어드 방식을 나중에 새 기준에 맞출 수 있을지 모른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405선 장비를 가진 회사는 마르코니-EMI 하나뿐이었습니다. 베어드 방식 방송은 그보다 앞선 1월 30일 토요일이 마지막이었고, 그 뒤로는 마르코니-EMI 방식만 전파를 탔습니다. 당시 신문들은 베어드 주가가 떨어지고 EMI 주가가 크게 올랐다고 전했습니다.
여섯 달로 잡았던 시험은 석 달 만에 끝났습니다. 우리는 흔히 발명가와 대기업이 시청자 앞에서 맞붙는 결승전을 떠올립니다. 그런 승부는 없었습니다. 있었던 건 하루 두 시간을 채워야 하는 제작진의 한 주, 또 한 주였습니다. 한 주는 카메라가 움직였고, 다음 주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개국식 날 귀빈들은 단상에 섰지만, 판정은 스튜디오 안에서 먼저 났습니다. 옆방에는 전화가 있었습니다. 모스 부호를 고집할 제작진은 없었습니다.
출처·참고
- BBC, History of the BBC, 'Opening Night: November 1936', 'Baird and Moseley' (David Hendy)
- 「출처 ↗」 John Wyver, OTD in early British television: 30 January 1937 — Illuminations
- 「출처 ↗」 80 years ago: The opening of the British Television Service — Science and Media Museum
- 「출처 ↗」 A chronology of British television — Science and Media Museum
- 「출처 ↗」 Opening Night of Television — Google Arts & Culture (BBC, Alexandra Palace Television Society)
- 「출처 ↗」 Malcolm Baird, Television — 75 years after Alexandra Palace
- 「출처 ↗」 Baird/EMI Competition — Early Television Museum
- 「출처 ↗」 London Television Service, Nature 139, 280 (1937)
- 「출처 ↗」 British Television, Auckland Star, 1937년 2월 6일 — Papers Past
- 「출처 ↗」 1937 TV — British Vintage Wireless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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