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마라톤 내일 — 다섯 구 코스는 한 번만 쓰려던 길이었습니다

Woody Magazine

뉴스가 아닌 것들을 씁니다

2026년 10월 31일 (토)

스포츠 이야기1976년 뉴욕 마라톤

뉴욕 마라톤 내일 — 50년 전 다섯 구 코스는 한 번만 쓰려던 길이었습니다

1976년 파산 직전이던 뉴욕이 다섯 구의 길을 마라톤에 내준 날, 그 비용을 누가 냈는지 따라갑니다.

한눈에 보기

이 글을 카드 6장으로 정리했습니다.옆으로 넘겨 보세요 →

뉴욕 마라톤 — 다섯 구 코스는 한 번만 쓰려던 길이었다 — 1976년 건국 200주년에 맞춰 한 번 쓰려고 낸 길이었습니다. 그해 뉴욕은 파산 직전이었습니다. 하루 동안 길을 비우는 비용은 누가 냈을까요. (카드 1/6) 공원을 네 바퀴 남짓 도는 대회 — 1970년 첫 대회는 127명이 등록해 55명이 완주했습니다. 구경꾼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회는 1975년까지 공원 안에서 열렸습니다. — 첫 대회 참가비 1달러 (카드 2/6) "그 돈을 어디서 구합니까" — 다섯 구를 돌자는 제안에 대회 감독 프레드 리보는 처음에 반대했습니다. 1만 5천 달러가 들고, 길목마다 경찰도 세워야 했습니다. 뉴욕은 한 해 전 빚을 갚지 못할 위기까지 몰렸습니다. (카드 3/6) 시는 길을, 부동산 집안은 돈을 — 맨해튼 구청장 퍼시 서턴이 루딘 형제를 설득했습니다. 사무실 건물을 여러 채 가진, 뉴욕에 사람이 다시 와야 하는 집안이었습니다. 시장은 대회를 건국 200주년 행사에 넣었습니다. — 2만 5천 달러 (카드 4/6) 스타 두 명에게 건넨 봉투 — 신문과 방송에 나오려면 이름난 선수가 필요했습니다. 허시가 프랭크 쇼터와 빌 로저스에게 3,000달러 수표를 하나씩 건넸습니다. 합법이었지만 당시 아마추어 규정에는 어긋났습니다. — 3,000달러 × 2 (카드 5/6) 구경꾼이 몰리자 이듬해에도 같은 길 — 첫해 1,549명이 완주했고 다섯 구 길가에서 수만 명이 지켜봤습니다. 루딘 집안은 그 뒤로도 주요 후원자로 남았습니다. — 사진: 2013년 뉴욕 마라톤, 퀸스 롱아일랜드시티 · Jim.henderson · CC0 (카드 6/6)

내일(11월 1일) 아침 뉴욕 스태튼아일랜드에서 올해 뉴욕 마라톤이 출발합니다. 뉴욕시는 다섯 개 자치구(borough)로 나뉩니다. 주자들은 다리 다섯 개를 건너 다섯 구를 모두 지난 뒤 센트럴파크로 들어옵니다. 지난해 이 길을 끝까지 달린 사람은 5만 9천여 명이었습니다.

이 코스를 뉴욕 마라톤의 원래 모습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해마다 같은 길을 달리니 그럴 만합니다. 그런데 다섯 구를 다 도는 길은 1976년 미국 건국 200주년에 맞춰 한 번 쓰려고 낸 길이었습니다. 그해 뉴욕은 파산 직전이었습니다.

돈 없는 도시가 하루 동안 길을 비우려면 누군가 비용을 대야 합니다. 그 돈을 낸 쪽을 보면, 이 대회가 왜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는지가 보입니다.

센트럴파크 네 바퀴

뉴욕 마라톤은 1970년 9월 센트럴파크에서 시작했습니다. 공원 순환도로를 네 바퀴 남짓 도는 경기였습니다. 참가비는 1달러였습니다. 127명이 등록했는데 여자는 한 명뿐이었고, 끝까지 달린 사람은 55명이었습니다.

구경꾼도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잡지 발행인이자 러너였던 조지 허시는 훗날 이 대회를 함께 키운 사람입니다. 허시는 공원 시절 대회를 두고, 공원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마침 지나가던 사람들이었다고 회고합니다. 대회는 1975년까지 공원 안에서 열렸습니다.

1976년, 돈 없는 도시

1976년, 공원을 나가 다섯 구를 다 돌자는 제안이 나왔습니다. 대회는 비영리 러닝클럽 뉴욕 로드러너스(NYRR)가 엽니다. NYRR은 지금 이 아이디어를 장거리 주자 테드 코빗과 시 공무원 조지 스피츠의 것으로 기록합니다.

대회 감독 프레드 리보는 처음에 반대했습니다. 리보는 루마니아 출신입니다. 맨해튼 의류업계에서 일하며, 1970년 첫 대회를 당시 NYRR 회장 빈스 키아페타와 함께 꾸렸습니다. 허시가 전하는 리보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그런 대회는 1만 5천 달러가 들 텐데, 그 돈을 어디서 구합니까."

리보가 망설일 만했습니다. 도시 사정은 더 나빴습니다. 뉴욕은 1975년 빚을 갚지 못할 위기까지 몰렸고, 범죄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42.195킬로미터를 하루 막으려면 길목마다 경찰을 세워야 했습니다.

2만 5천 달러를 낸 형제

판을 바꾼 사람은 맨해튼 구청장 퍼시 서턴이었습니다. 서턴은 부동산 집안의 잭 루딘과 루이스 루딘 형제를 설득해 2만 5천 달러를 받아 냈습니다.

2만 5천 달러
루딘 형제가 낸 돈. 리보가 걱정한 전체 비용보다 1만 달러가 많았습니다.

루딘 집안은 맨해튼에 사무실 건물을 여러 채 가진 집안이었습니다. 루이스 루딘은 1971년 기업 대표들과 '더 나은 뉴욕 협회'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범죄 걱정이 커지던 때에 뉴욕을 기업하기 좋은 도시로 알리려고 만든 모임이었습니다. 형제에게는 다른 뜻도 있었습니다. 장거리 주자였던 아버지 새뮤얼을 기리고 싶어 했고, 우승 트로피에는 지금도 아버지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허시 등의 회고로는 후원사 세 곳이 2만 5천 달러를 더 냈습니다. 첫 다섯 구 대회의 후원금은 그렇게 약 5만 달러가 됐습니다.

길을 내준 시청

시장 에이브러햄 빔은 이 대회를 건국 200주년 행사에 넣었습니다. 시장이 허락하자 길을 막을 수 있었고, 길목마다 경찰이 섰습니다. 허시는 서턴, 리보와 함께 시장을 찾아가 도시가 기운을 되찾으려면 마라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회고합니다.

시에도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2018년 웹진 『퍼블릭 세미나』의 기고에 따르면, 서턴은 이 대회를 값싼 도시 홍보 행사로 보았습니다. 경찰과 환경미화원을 초과근무로 쓰는 일도 서턴이 시장을 설득해 얻어 냈습니다.

우리 동네 상가 번영회가 여는 축제를 떠올리면 이 구조가 쉽게 보입니다. 축제에 사람이 몰리면 가게가 삽니다. 그래서 축제 비용을 구청 예산만으로 대지는 않습니다. 구청은 길을 내주고, 돈은 그 거리에 건물과 가게를 가진 쪽이 걷습니다. 1976년 뉴욕의 돈도 같은 쪽에서 나온 셈입니다. 뉴욕에 손님이 다시 와야 장사가 되는 쪽입니다.

봉투 두 장

축제가 알려지려면 얼굴도 필요했습니다. 신문과 방송이 다섯 구 대회를 다루게 하려면 이름난 선수가 뛰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불렀습니다. 1972년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프랭크 쇼터, 그리고 1975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빌 로저스입니다.

두 사람은 각각 3,000달러짜리 수표가 든 봉투를 받았습니다. 허시가 건넨 돈이었습니다. 지급 자체는 합법이었습니다. 다만 당시 미국 육상 경기단체는 마라토너를 무보수 아마추어로 규정했고, 이 돈은 그 규정에 어긋났습니다. 허시는 40년 뒤 AP 인터뷰에서 이 일을 직접 밝혔습니다. 올해 NYRR이 내놓은 공식 정리에도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이듬해에도 같은 길

1976년 10월 24일, 2,090명이 등록했고 1,549명이 센트럴파크 결승선을 넘었습니다. 우승은 로저스, 2위는 쇼터였습니다. 공원을 돌던 1975년 대회에는 534명이 출발했으니, 한 해 만에 네 배 가까이 늘어난 셈입니다.

더 크게 달라진 건 길가였습니다. 공원을 지나던 사람 몇이 보던 경기를, 다섯 구의 동네 길가에서 수만 명이 지켜봤습니다. 도시를 알리려던 행사로서는 첫해부터 손님을 모은 셈입니다.

앰비 버풋은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출신 육상 저널리스트입니다. 버풋에 따르면 설립자들은 이 대회를 한 번짜리 행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허시의 말로는, 1976년 뒤로 시 전역 마라톤을 또 열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루딘 집안도 대회가 커지는 동안 주요 후원자로 남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뉴욕 마라톤은 그다음부터입니다. 대회는 허리케인 샌디가 덮친 2012년과 코로나19가 번진 2020년을 빼고 해마다 다섯 구를 돌았습니다. 올해는 다섯 구 코스 50년을 기념하는 완주 메달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상가 축제가 손님을 모으면 번영회는 이듬해에도 돈을 걷습니다. 1976년 뉴욕의 다섯 구 마라톤도 그런 축제였고, 첫해에 구경꾼이 몰렸습니다. 손님이 왔으니 번영회는 다음 해에도 돈을 걷었습니다.

출처·참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