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아가라 통 하강 125년 — 매니저는 통만 들고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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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4일 (토)

인문학애니 에드슨 테일러 나이아가라 하강 125년

나이아가라 통 하강 125년 — 매니저는 사람 대신 통을 들고 갔습니다

1901년 10월 24일, 예순세 번째 생일에 통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넘어 살아남은 첫 사람. 애니 에드슨 테일러는 그 뒤 오랫동안 통 옆에 앉아 엽서를 팔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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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세, 매니저는 통만 들고 갔다 — 1901년 10월 24일 예순세 번째 생일, 통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넘어 살아남은 첫 사람 애니 에드슨 테일러 (카드 1/6) 켄터키산 참나무 통, 무게 73kg — 출발 전 배에 탄 테일러와 통 사진(작자 미상, 나이아가라 헤리티지 재단 컬렉션) (카드 2/6) 50m 안팎을 떨어져 살아 나왔다 — 1901년 10월 24일 오후 4시 5분 말굽 폭포. “다시는 아무도 이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 생존자는 10년 뒤인 1911년에 나왔습니다 (카드 3/6) 63 → 43, 스스로 밝힌 나이는 마흔셋 — 1901년 11월 버펄로 박람회 무렵. 1년 전 인구조사에도 나이를 스무 살쯤 줄여 적었습니다 (카드 4/6) 두 매니저 모두 통을 들고 떠났다 — 통 옆에 선 테일러 사진, 통에 첫 매니저 F.M. 러셀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작자 미상, 프랜시스 J. 페트리 사진 컬렉션) (카드 5/6) 모조 통을 만들어 그 옆에 앉았다 — 몇 해 뒤 폭포 가는 길목에서 엽서와 수기를 팔다가, 1921년 끝내 피하려던 구빈원에서 여든두 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카드 6/6)

1901년 11월 2일, 미국 버펄로의 범미 박람회가 마지막 날을 맞았습니다. 북미와 남미 나라들이 산업과 기술을 자랑하던 큰 박람회였고, 버펄로에서 나이아가라 폭포까지는 30km 남짓이었습니다. 이날 박람회장 광장 무대에 예순세 살 여성이 앉아 있었습니다. 아흐레 전 나무통을 타고 그 폭포를 넘어 살아 돌아온 애니 에드슨 테일러입니다. 수천 명이 줄을 지어 무대를 한 바퀴 돌며 그를 구경했습니다.

무대에는 테일러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탔던 통, 몸을 묶었던 끈, 통 안에 공기를 넣은 자전거 펌프가 함께 올라와 있었습니다. 엿새 먼저 같은 통을 타고 폭포를 넘은 검은 고양이도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취재한 지역 신문 버펄로 이브닝 뉴스의 기자는 테일러를 두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테일러 부인은 본인이 밝힌 마흔세 살로 충분히 보인다." 실제 나이는 예순셋이었습니다.

테일러의 이야기는 흔히 이렇게 전해집니다. 용감했지만 운이 나빴던 노년 여성이 나쁜 매니저를 만나 가진 것을 다 잃고 쓸쓸히 죽었다. 영어권 매체들도 대개 이 틀로 그를 다룹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날 무대를 다시 보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본 것이 테일러 한 사람이었는지 묻게 됩니다. 놀이공원의 인형탈 앞에 늘어선 줄을 떠올리면 쉽습니다. 아이들은 탈과 사진을 찍고, 탈 안에 누가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구빈원 대신 폭포

테일러는 1838년 뉴욕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어서 남편을 잃었고, 그 뒤로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며 학교 교사로, 또 춤과 체조를 가르치는 강사로 살았습니다. 예순을 넘기자 학생은 줄고 모아 둔 돈도 바닥을 보였습니다.

그 앞에 놓인 길은 구빈원이었습니다. 구빈원은 당시 미국의 카운티가 운영하던 시설로, 돈도 돌봐 줄 가족도 없는 노인과 빈민이 마지막에 들어가는 곳이었습니다. 테일러는 그곳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돈을 벌 방법을 2년 동안 궁리하던 테일러는 1901년, 미시간주 베이시티에서 신문을 읽다가 버펄로 박람회 기사에서 번뜩 한 문장을 떠올렸습니다. 이듬해 펴낸 수기에 그는 그 문장을 그대로 적어 두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통을 타고 넘자."

지금 우리 눈에는 무모해 보여도 계산은 단순했습니다. 아무도 살아서 해낸 적 없는 일을 해내면 이름이 납니다. 이름이 나면 강연을 다니며 노후를 꾸릴 수 있습니다. 흥행 일을 맡길 매니저로는 장터 흥행과 거리 공연을 기획하던 프랭크 러셀을 들였습니다. 남은 건 통이었습니다. 테일러는 종이를 오려 꿰매 직접 본을 뜨고, 제작은 베이시티 인근의 통 장인에게 맡겼습니다. 켄터키산 참나무 판을 쇠테로 조인 통으로, 무게가 160파운드(약 73kg)였습니다. 안에는 쿠션을 넣고 몸을 붙들어 줄 끈을 달았습니다.

1901년 10월 24일 오후 4시 5분

10월 24일은 테일러의 예순세 번째 생일이었습니다. 오후에 일행은 배에 통을 싣고 나이아가라강 상류의 작은 섬 그래스섬까지 나갔습니다. 테일러는 거기서 통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일행이 자전거 펌프로 공기를 채우자, 테일러가 안에서 공기 관 끝을 코르크로 막았습니다. 3시 50분에 배가 통을 끌고 캐나다 쪽 물살로 나갔고, 4시 5분에 뱃사람들이 줄을 놓았습니다.

통은 1km가 넘는 급류를 굴러 내려가 말굽 폭포를 넘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가운데 캐나다 쪽에 있는, 이름처럼 말발굽 모양으로 휜 폭포입니다. 높이는 50m 안팎입니다. 폭포 아래로 떨어진 통은 물가 바위 쪽으로 밀려왔습니다. 사람들이 통을 열었을 때 테일러는 거의 정신을 잃고 있었습니다. 머리에 상처가 났을 뿐 크게 다친 데는 없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이 한마디입니다.

"다시는 아무도 이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그만큼 위험했고, 그만큼 드문 일이었습니다. 같은 일을 하고 살아남은 두 번째 사람은 10년 뒤인 1911년에야 나왔습니다. 신문들은 곧 테일러에게 '안개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클리블랜드 백화점 진열창

그런데 신문마다 그의 나이가 달랐습니다. 이튿날 보스턴 저널은 쉰 살이라고 썼고, 박람회 광고와 다른 신문에는 마흔세 살로 실렸습니다. 마흔셋은 테일러가 스스로 밝힌 나이였습니다.

63 → 43
실제 나이와, 1901년 11월 박람회 기사에 적힌 나이

거짓말이었지만 폭포 때문에 처음 한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테일러는 1년 전 연방 인구조사에도 나이를 스무 살쯤 줄여 적었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낸 1902년 수기에서도 태어난 해를 1855년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을 잃고 40년 가까이 혼자 가르치는 일로 먹고산 사람에게, 나이는 일감과 바로 이어지는 숫자였을 겁니다. 강연장 표를 사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한 것도 씩씩한 여걸이었습니다. 젊은 얼굴에 돈이 더 붙는다는 것을, 테일러는 폭포를 넘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무대 위의 테일러는 그 여걸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박람회 날 기자 눈에도 그는 막 병상에서 일어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강연도 기대만큼 풀리지 않았습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나이아가라폴스시의 공식 역사가 셔먼 재비츠는 그가 무대에서 청중을 휘어잡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평가합니다.

강연 대신 들어온 일 가운데 하나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백화점 진열창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쇼핑객이 오가는 가게 창 안에서 하루 한 시간씩, 통과 고양이를 옆에 두고 앉아 있는 일이었습니다. 폭포를 처음 넘은 사람이 받은 일감이, 유리창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순회가 이어지던 중에 러셀이 통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테일러는 사람을 사서 통을 찾게 했고, 모아 둔 돈은 대부분 그 비용으로 나갔습니다. 나중에 수기에서 그는 러셀을 매니저로 고른 일을 '내 큰 실수'라고 불렀습니다.

시카고에서 다시 찾은 통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 눈에 러셀은 영락없는 악당입니다. 이야기도 깔끔합니다. 나쁜 매니저가 노인의 밥줄을 들고 달아났다. 그런데 같은 일이 한 번 더 일어납니다.

사람을 사서 찾던 통은 시카고에서 나왔습니다. 테일러는 통을 되찾아 나이아가라폴스로 돌아왔고, 새 매니저를 구해 다시 순회에 나섰습니다. 이 새 매니저도 순회 도중 통을 가지고 갈라섰습니다.

통이 테일러 손을 떠나 있던 사이, 훨씬 젊은 여성이 '나이아가라의 여걸'을 자처하며 그 통 옆에 서서 순회를 다녔다는 기록이 여러 갈래로 남아 있습니다. 이 일을 꾸민 사람이 첫 매니저인지 두 번째 매니저인지는 기록마다 다릅니다. 누가 꾸몄든 결과는 같았습니다. 통과 젊은 얼굴만 있으면 테일러 없이도 무대가 섰습니다.

인형탈이 그렇습니다. 탈만 있으면 안에 들어갈 사람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두 매니저가 똑같이 사람을 두고 통을 챙긴 것도 그래서였을 것입니다. 폭포를 넘는 일 자체는 한 번으로 끝났습니다. 테일러 자신도 다시는 아무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무대에 다시 올릴 수 있는 건 그 일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뿐이었고, 그게 통이었습니다. 우리가 놀이공원에서 사진을 찍고 돌아설 때 탈 속 얼굴을 궁금해하지 않듯, 1901년의 구경꾼도 통 옆 얼굴을 크게 따지지 않았던 듯합니다.

모조 통과 얇은 수기

두 번째로 사라진 통은 끝내 테일러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테일러는 통을 하나 새로 맞췄습니다. 처음 종이로 본을 떴던 그 통을 다시 본뜬 모조 통이었습니다. 몇 해 뒤부터 그는 폭포 가는 길목의 식당 앞에 그 통을 세워 두고 앉았습니다. 관광객에게 엽서와 사진, 자기 수기 『폭포를 넘어(Over the Falls)』를 팔았습니다. 폭포 근처 사람들에게 그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 됐습니다.

말년에 테일러는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1921년 2월 그는 끝내 피하려던 곳에 들어갔습니다. 뉴욕주 록포트에 있는 나이아가라 카운티 구빈원입니다. 들어가면서 그는 나이를 쉰일곱이라고 했습니다. 그해 4월, 폭포를 넘은 지 스무 해 만에 여든두 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는 남은 돈이 없었습니다. 묘비는 지인들이 돈을 모아 세웠습니다.

테일러가 해낸 일은 한 번뿐이었고, 다시 보여 줄 수 있는 건 통뿐이었습니다. 통은 남의 손에 들려 다녔고, 통 옆의 얼굴은 갈아 끼울 수 있었습니다. 말년의 테일러는 모조 통을 만들어 그 옆에 앉았습니다. 탈을 새로 맞춘 셈입니다. 이번엔 주인이 직접 들어갔습니다.

출처·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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