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투스두몽 비행 120년 — 심판들은 거리를 재는 걸 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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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3일 (금)

잡학산투스두몽 첫 비행 120년

산투스두몽 비행 120년 — 심판들은 거리를 재는 걸 잊었습니다

1906년 파리에서 공인받은 거리는 25m였습니다. 한 해 전 그보다 1,500배 넘게 날았던 라이트 형제는 그해 한 번도 날지 않았습니다.

한눈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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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m, 심판들은 거리를 재는 걸 잊었다 — 1906년 10월 23일 파리 바가텔, 60m 남짓 날았지만 공인 기록은 상을 주는 최소 거리였습니다 (카드 1/6) 상자 연 여러 개를 이어 붙인 모양 — 산투스두몽의 14-bis 사진(쥘 보 촬영,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 (카드 2/6) 파리보다 먼저, 12초에 36m —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 플라이어의 첫 비행 사진(존 T. 대니얼스 촬영,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카드 3/6) 38.9km, 공인 거리의 1,500배 — 1905년 10월 5일 윌버 라이트는 39분 넘게 날았지만 지켜본 사람은 친구 몇과 동네 농부 몇이었습니다 (카드 4/6) 특허 때문에 2년 반 동안 땅에 — 날개 끝을 비트는 조종법을 남이 베껴 갈 수 있었습니다 (카드 5/6) 기록은 지켜본 사람이 적는다 — 라이트 형제가 먼저 날았고, 산투스두몽이 먼저 기록됐습니다 (카드 6/6)

120년 전 오늘, 1906년 10월 23일 오후 4시 45분이었습니다. 파리 서쪽 불로뉴 숲의 바가텔 잔디밭에서 비행기 한 대가 땅을 떴습니다. 이름은 '14-bis'. 상자 모양 연을 여러 개 이어 붙인 것처럼 생겼습니다. 조종사는 날개 앞에 매단 바구니에 선 채로 탔습니다. 비행기는 3m쯤 떠올라 60m 남짓 날아간 뒤 잔디밭에 내려앉았습니다. 바구니에 선 사람은 브라질 커피 농장주의 아들 알베르투 산투스두몽이었습니다. 몇 해 전 비행선으로 에펠탑을 돌아, 파리에서는 이미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프랑스 항공 클럽 '아에로클럽 드 프랑스'의 심사위원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1898년에 생긴 이 클럽은 비행 시도를 지켜보고 기록을 공인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이날 심사위원들은 거리를 재지 못했습니다. 현장에 있던 프랑스 육군 장교 페르디낭 페르베르 대위의 기록을 보면, 다들 넋을 놓고 보느라 재는 걸 잊었습니다. 위원회는 결국 상을 주는 데 필요한 최소 거리, 25m만 공인했습니다. 규정집 숫자를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그래도 소식은 컸습니다. 유럽에서는 아직 라이트 형제가 나는 걸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비행가들은 이 비행을 공기보다 무거운 기계의 세계 첫 비행으로 떠받들었습니다.

25m
아에로클럽이 그날 공인한 거리. 실제 비행은 60m 안팎이었습니다.

브라질은 오늘을 '비행사의 날'로 기립니다. 1936년 법률 218호로 정한 기념일이고, 브라질 공군의 날이기도 합니다. 브라질에서 비행기를 처음 띄운 사람을 물으면 많은 사람이 산투스두몽을 꼽습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비행기는 라이트 형제가 먼저 띄우지 않았나. 우리가 배운 답이 틀린 건 아닙니다. 동생 오빌 라이트는 1903년 12월 1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모래언덕에서 12초 동안 36m를 날았습니다. 형제 말고도 다섯 사람이 그 장면을 봤습니다. 2년 뒤에는 형 윌버가 39분 넘게 날았습니다.

그렇다면 120년 전 파리의 심사위원들은 왜 산투스두몽에게 상을 줬을까. 육상 기록에 빗대 보면 쉽게 풀립니다. 동네 운동장에서 친구 몇이 지켜보는 가운데 낸 기록은 아무리 빨라도 기록집에 오르지 못합니다. 기록집에 오르는 건 심판이 지키는 공인 대회 기록뿐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계 기록도 그렇게 나온 숫자입니다. 1906년 유럽에서 그 대회를 연 곳이 아에로클럽이었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그 대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1903년, 미국에 뒤지지 말자는 편지

그 대회를 만든 사람들은 처음부터 미국을 의식했습니다. 1903년 4월, 미국 시카고의 기술자 옥타브 샤누트가 파리 아에로클럽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샤누트는 라이트 형제와 편지를 주고받던 글라이더 연구자였습니다. 그날 강연에서 두 형제의 실험을 소개했습니다.

강연 소식을 들은 페르베르 대위는 클럽 창립 회원인 변호사 에르네스트 아치디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의 한 구절이 그달 프랑스 잡지 두 곳에 실렸습니다.

"비행기가 미국에서 완성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아치디콘은 그 구절을 소개한 글에서, 몽골피에 형제의 나라가 하늘의 마지막 발견을 남의 나라에 넘기는 수모를 겪겠느냐고 썼습니다. 몽골피에 형제는 1783년 열기구를 처음 띄운 프랑스 사람들입니다. 그해 아치디콘과 아에로클럽은 상을 하나 내걸었습니다.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 기계로 25m를 처음 넘는 사람에게 은컵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120년 전 오늘 산투스두몽이 받은 '아치디콘 컵'이 바로 이 컵입니다. 말하자면 이 대회는 처음부터 미국을 상대로 한 경주에 가까웠습니다.

라이트 형제도 이 분위기를 알았습니다. 그해 6월 페르베르는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의 실험장에 가서 글라이더를 배우고 싶다는 뜻을 비쳤습니다. 윌버 라이트는 아치디콘에게 보낸 그 편지를 들어 속셈을 의심했습니다.

1905년 데이턴의 소 목장

라이트 형제는 1904년부터 고향 오하이오주 데이턴 근처의 소 목장 허프먼 프레리에서 비행을 연습했습니다. 형제와 알고 지내던 목장 주인이 땅을 빌려줬습니다.

1905년 10월 5일, 윌버는 이 목장 위를 빙빙 돌며 39분 넘게 날았습니다. 연료가 떨어지고서야 내려왔고, 날아간 거리는 38.9km였습니다. 이듬해 산투스두몽이 공인받은 25m의 1,500배가 넘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본 사람은 형제가 부른 친구 몇과 동네 농부 몇이 전부였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대회 기록을 훌쩍 넘는 비행을 동네 운동장에서 해낸 셈입니다. 대회에 나갔다면 상대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형제는 그 뒤로 2년 반 동안 아예 날지 않았습니다.

라이트 형제가 땅에 있던 2년 반

형제의 마지막 비행은 1905년 10월 16일이었습니다. 다시 날지 않은 이유는 특허였습니다. 형제는 1903년 3월 '비행 기계' 특허를 출원했습니다. 신청서의 핵심은 날개 끝을 비틀어 기체를 좌우로 기울이는 조종법이었습니다. 특허가 나오기 전에 비행을 보여 주면 이 방법을 남이 베껴 갈 수 있었습니다. 특허는 1906년 5월 22일에야 나왔습니다.

특허를 받은 뒤에도 형제는 비행기를 감췄습니다.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 정부에 비행기를 팔려고 협상하던 중이었습니다.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비행은커녕 기체조차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1906년 3월 말에는 프랑스 조사단이 데이턴까지 찾아와 시범 비행을 청했지만 형제는 거절했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비슷하게 했을지 모릅니다. 특허를 지키는 소송은 길고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한 번 보여 주고 나면 되돌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대가로 형제는 유럽에서 평판을 잃었습니다. 프랑스 신문들은 두 형제를 '허풍쟁이'라고 불렀습니다. 『뉴욕 헤럴드』 파리판은 1906년 2월 10일 사설에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날았든지 안 날았든지 둘 중 하나라고.

형제가 비워 둔 대회장에 그해 가을 나온 사람이 산투스두몽이었습니다. 9월 13일 첫 시도는 7m쯤 뜨다 떨어졌습니다. 기체가 상했습니다. 그리고 10월 23일, 아치디콘 컵을 받았습니다. 11월 12일에는 21.2초 동안 220m를 날았습니다. 100m를 처음 나는 사람에게 걸린 아에로클럽 상도 받았습니다. 바가텔에는 지금도 이날 세계 첫 항공 기록을 세웠다고 새긴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1908년 르망

형제가 대회장에 나온 건 1908년 여름이었습니다. 그해 3월 형제는 프랑스 부호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라이트 비행기를 만들고 팔 권리를 맡기는 계약이었습니다. 윌버는 8월 8일 프랑스 르망 근처 위노디에르 경마장에서 유럽 첫 공개 비행을 했습니다. 경마장을 두 바퀴 돈 짧은 비행이었습니다. 그 짧은 비행 하나로 형제를 허풍쟁이라 부르던 목소리가 잦아들었습니다. 두 형제는 하룻밤 새 세계적인 유명인이 됐습니다.

윌버는 그해 12월 31일까지 근처 포병 훈련장에서 비행을 이어 가며 기록을 여럿 세웠습니다. 동네 운동장에서만 달리던 선수가 마침내 공인 대회에 나온 것입니다. 대회에서 실력을 보이자 운동장 시절 기록도 믿을 만한 기록이 됐습니다. 유럽은 형제가 1903년부터 날았다는 주장을 이때 비로소 받아들였습니다.

워싱턴의 표지판, 1918년부터 1942년까지

그런데 정작 미국의 기록집은 유럽보다 한참 늦었습니다. 미국 국립 박물관이자 연구 기관인 스미스소니언 협회는 1918년부터 비행기 한 대를 전시했습니다. 설명문에는 '지속 비행이 가능한 세계 최초의 유인 비행기'라고 적었습니다. 협회 3대 사무총장 새뮤얼 랭글리가 만든 '에어로드롬'이었습니다. 이 비행기는 1903년 두 번 시험해 두 번 다 실패했습니다. 라이트 형제가 첫 비행에 성공한 건 두 번째 실패 아흐레 뒤였습니다.

에어로드롬이 하늘에 뜬 건 1914년이었습니다. 스미스소니언이 비행기 제작자 글렌 커티스에게 기체를 내줬고, 커티스가 크게 뜯어고친 뒤에야 떴습니다. 커티스는 라이트 형제와 특허 다툼을 벌이던 사람이었습니다. 1903년에 이미 날 수 있던 비행기가 있었다고 인정받으면, 커티스는 라이트 특허를 비켜 갈 수 있었습니다.

형 윌버는 191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혼자 남은 오빌은 항의의 뜻으로 1903년 비행기를 1928년 영국 런던 과학박물관에 맡겼습니다. 스미스소니언은 1942년에야 연례 보고서에서 개조 내용을 밝히고 주장을 거둬들였습니다. 오빌은 1948년 1월 숨졌습니다. 비행기는 그해 12월 17일, 첫 비행 45주년에 워싱턴으로 돌아왔습니다.

스미스소니언이 라이트 형제의 자리를 바로 적기까지, 표지판을 건 해로부터 24년이 걸렸습니다.

120년 뒤의 평가

브라질은 지금도 산투스두몽을 첫 비행사로 봅니다. 브라질 연구자들은 당시 기준이 두 가지였다고 설명합니다. 스스로 달려 떠오를 것, 정해진 거리를 공개된 자리에서 전문가 앞에 날아 보일 것. 라이트 형제는 1904년 9월부터 바람이 약한 날 발사 장치를 썼습니다. 높이 6m 안팎의 나무탑에서 무거운 추를 떨어뜨려 기체를 레일 위로 끌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1903년 첫 비행은 이 장치를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초속 12m 안팎의 맞바람을 안고 레일에서 떴습니다. 브라질 쪽은 이 발사 장치와 맞바람을 함께 근거로 듭니다.

브라질 밖의 항공사 전문가들은 대부분 다른 답을 냅니다.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의 피터 자캅 명예 큐레이터는 브라질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발사 장치 때문에 라이트 형제의 비행이 무효라는 말은 터무니없다고 했습니다. 프랑스 항공우주박물관의 마리옹 베케를도 같은 생각입니다. 라이트 형제가 산투스두몽보다 먼저 날았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습니다. 120년 전 산투스두몽에게 컵을 준 나라의 박물관이 지금은 라이트 형제 쪽 답을 적고 있습니다.

동네 운동장에서 먼저 달린 형제는 대회에 늦게 나왔고, 대회장 심판은 재는 걸 잊었습니다. 같은 하늘을 두고 답이 갈리는 건 서로 다른 해의 기록집을 펴기 때문입니다. 브라질은 심판이 25m라고 적은 1906년 파리의 기록집을 폅니다. 나머지 세계는 르망 이후 고쳐 쓴 기록집을 폅니다. 워싱턴이 자기 기록집을 바로잡은 건 1942년이었습니다. 먼저 난 쪽은 라이트 형제였습니다. 먼저 적힌 쪽은 산투스두몽이었습니다. 기록은 지켜본 사람이 적습니다.

출처·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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