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러브 루시」 75년 — B급 배우가 RKO 촬영소를 샀습니다
Woody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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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5일 (목)
「아이 러브 루시」 75년 — RKO의 B급 배우가 그 촬영소를 샀습니다
부부는 출연료를 깎는 대신 필름을 가졌고, 그 필름으로 회사를 키웠습니다
세 줄 요약
- 1951년 CBS는 「아이 러브 루시」를 뉴욕에서 생방송으로 내보내려 했고, 루실 볼과 데시 아나즈 부부는 할리우드에 남겠다고 버텼습니다.
- 부부는 출연료를 깎고 필름 촬영비를 떠안는 대신 찍은 필름을 모두 갖기로 했습니다.
- 부부가 큰돈을 쥔 곳은 출연료가 아니라 그때 받아 둔 필름이었습니다. CBS는 1956년 그 필름의 권리를 430만 달러에 사들였습니다.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1939년 RKO와 계약한 오슨 웰스가 첫 영화의 주연으로 루실 볼을 원했습니다. 경영진은 반대했습니다. 볼이 영화 한 편을 혼자 끌고 갈 배우는 못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볼은 1935년부터 RKO와 계약을 맺고 일하던 배우였습니다. 주로 저예산 B급 영화에 나왔습니다.
18년 뒤인 1957년 말, 볼은 남편 데시 아나즈와 함께 그 RKO의 촬영소를 샀습니다.
75년 전 오늘인 1951년 10월 15일 밤, 미국 CBS에서 부부의 시트콤 「아이 러브 루시」가 첫 방송을 했습니다. 부부가 텔레비전에서 크게 성공해 큰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옛 직장을 샀다고 정리하면 우리가 아는 성공담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이 쇼는 여섯 시즌 가운데 네 시즌을 시청률 1위로 마쳤습니다.
그런데 부부는 이 쇼를 시작하면서 오히려 출연료를 깎았습니다. 대신 받아 둔 것이 있었습니다.
1951년, 텔레비전은 뉴욕에서 생방송으로 나갔습니다
1951년의 텔레비전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방송사들은 프로그램 대부분을 뉴욕에서 생방송으로 내보냈습니다.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동부에 더 많았고, 방송사의 제작 시설도 뉴욕에 몰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간대가 세 시간 늦은 서부 사람들은 무엇을 봤을까요. 키네스코프라는 녹화본을 봤습니다. 방송이 나가는 동안 텔레비전 화면에 필름 카메라를 대고 그대로 찍어 둔 것입니다. 화면을 한 번 더 찍었으니 화질이 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CBS와 광고주인 담배 회사 필립 모리스는 「아이 러브 루시」도 뉴욕에서 생방송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생방송을 하면 거꾸로 동부가 흐린 녹화본을 보게 됩니다. 광고주에게 동부는 가장 돈이 되는 시장이었습니다.
부부는 할리우드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볼과 아나즈는 로스앤젤레스를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몇 해째 그곳에 집을 두고 살았고, 영화 촬영소의 장비와 사람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영화처럼 35mm 필름으로 찍어 그 필름을 보내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동부와 서부가 똑같이 선명한 화면을 봅니다.
부부는 관객 앞에서 연기할 때 살아나는 볼의 웃음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관객을 앉혀 놓고 필름 카메라 여러 대로 찍는 방법은 아나즈가 데려온 촬영감독 카를 프로인트가 풀었습니다. 1931년 영화 「드라큘라」를 찍은 사람입니다.
남은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필름 촬영은 생방송보다 비쌌고, CBS는 늘어나는 비용을 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합의는 세 가지였습니다. 필름 촬영에 드는 추가 비용은 부부의 제작사 데실루가 대기로 했습니다. 부부가 처음 요구한 주급 5,000달러는 4,000달러로 낮췄습니다. 그 대신 찍은 필름의 원판과 인화본은 전부 데실루가 갖기로 했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CBS가 손해 보는 계약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1951년 CBS 자리에 앉아 보면 망설일 이유가 별로 없었습니다. 생방송 시대의 방송은 한 번 나가면 끝이었습니다. 지나간 회차를 지역 방송국에 다시 파는 일도 아직 업계의 관행이 아니었습니다. CBS 쪽에서 보면 필름은 재산이라기보다 비용에 가까웠습니다.
결혼식 사진을 찍어 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거래를 압니다. 원본 파일까지 받으려면 추가금을 내야 합니다. 앨범이면 됐다 싶어 추가금을 아끼는 신랑 신부가 적지 않습니다. 원본은 사진관에 남습니다. 몇 해 뒤 원본이 필요해지면 그때는 사진관이 부르는 값을 내야 합니다.
CBS는 앨범만 받고 원본은 데실루에 두었습니다.
필름은 남았습니다
필름으로 찍은 방송은 남았고, 처음 화질 그대로 다시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시즌에 볼이 임신하자 CBS는 앞서 방송한 회차를 다시 내보냈습니다. 재방송인데도 시청률이 잘 나왔습니다.
1950년대 중반이 되자 「아이 러브 루시」는 재방송만으로 한 해 100만 달러 넘게 벌었습니다. 그 돈은 필름 주인인 데실루 몫이었습니다. 매주 덜 받은 1,000달러와는 자릿수가 다른 돈이었습니다.
데실루는 이 쇼 하나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작자의 시리즈를 맡아 찍었고, 자기 시리즈도 늘렸습니다. 1951년 열두 명이던 직원이 6년 만에 800명이 됐습니다.
1956년 10월, CBS가 필름을 샀습니다
1956년 10월 CBS는 데실루에 430만 달러를 주고 「아이 러브 루시」의 권리를 사 갔습니다. 5년 전 CBS가 촬영비를 내지 않으면서 데실루 몫이 된 그 필름입니다. 재방송으로 한 해 100만 달러 남짓 벌던 쇼였습니다. CBS는 몇 해치 재방송 수입을 한 번에 치르고 원본 값을 낸 셈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시트콤을 선명한 화질로 보는 것도 그 필름 덕분입니다.
1957년 말, 데실루가 RKO 촬영소를 샀습니다
1957년 말 데실루는 타이어 회사 제너럴 타이어로부터 RKO의 제작 시설을 600만 달러에 샀습니다. 할리우드 가워가의 본사 촬영소, 컬버시티 촬영소, 야외 촬영 부지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이 거래로 데실루가 가진 촬영 스튜디오는 33개가 됐습니다. 그해 MGM보다 4개, 20세기폭스보다 11개 많았습니다. 텔레비전 시트콤을 찍던 회사가 할리우드 대형 영화사보다 많은 촬영 스튜디오를 갖게 됐습니다.
RKO는 볼이 'B급 영화의 여왕'으로 불리다 1942년 MGM으로 떠난 바로 그 영화사였습니다. 아나즈도 한때 RKO의 계약 배우였습니다.
1951년 CBS는 필름 촬영비를 아꼈고, 원본은 데실루에 남았습니다. 5년 뒤 CBS는 그 원본에 430만 달러를 치렀습니다. 볼과 아나즈는 필름이 오래 값을 지닐 거라고 봤고, CBS는 촬영비를 먼저 셈했습니다. 값을 먼저 물은 쪽이 원본을 가졌습니다.
한눈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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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참고
- 출처 ↗ Television Academy Interviews, 「I Love Lucy」 (Museum of Broadcast Communications 『Encyclopedia of Television』 수록 항목)
- 출처 ↗ DGA Quarterly, 「Classics: I Love Lucy」, 2015년 봄호
- 출처 ↗ PBS American Masters, 「5 ways I Love Lucy transformed television」
- 출처 ↗ TCM, 「Twelve Crowded Hours」
- 출처 ↗ TCM, 「Star of the Month: Lucille Ball」
- 출처 ↗ MeTV, 「The big time economics of 'I Love Lucy'」
- 출처 ↗ Wikipedia, 「Desilu」
- Bart Andrews, 『The I Love Lucy Book』,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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