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년 전 오늘 재봉틀 특허가 나왔습니다 — 재봉틀은 안 팔렸고, 특허는 팔렸습니다 — Woody Magazine, 2026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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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10일 (목)
기업 이야기2026년 9월 10일

180년 전 오늘 재봉틀 특허가 나왔습니다 — 재봉틀은 안 팔렸고, 특허는 팔렸습니다

세 줄 요약
  1. 1846년 9월 10일 일라이어스 하우가 재봉틀 특허를 받았습니다. 한 대 300달러였고,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2. 하우는 소송에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긴 뒤에도 재봉틀을 온전히 만들 수 있는 회사는 한 곳도 없었습니다.
  3. 1856년 하우와 세 회사가 특허를 한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그때부터 재봉틀이 팔렸고, 하우는 그제야 부자가 됐습니다.

180년 전 오늘, 미국 특허청은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의 기계공 일라이어스 하우에게 4,750호 특허를 내줬습니다. 바늘 끝에 실구멍을 뚫고, 천 아래에서 북이 두 번째 실을 걸어 주는 재봉틀이었습니다. 이 방식이 지금 우리가 쓰는 재봉틀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우는 이 기계를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한 대에 300달러였습니다. 양복점 주인들은 구경만 하고 사지 않았습니다. 손으로 꿰매는 사람보다 몇 배 빠르다는 건 다들 인정했는데, 그래서 더 안 샀습니다. 이 기계가 양복 값을 떨어뜨리고 자기 가게를 망하게 할 거라고 봤습니다. 투자자도 손을 뗐습니다.

헤드라인에 특허가 팔렸다고 썼는데, 정확히는 판 게 아니라 빌려준 것입니다. 남이 재봉틀을 한 대 만들 때마다 얼마씩 받는 조건으로요. 그런데 이 빌려주는 장사가 기계 파는 장사보다 훨씬 컸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싱어가 베꼈다는 이야기

재봉틀 하면 우리는 싱어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싱어가 하우의 발명을 베껴서 부자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어 봤을 겁니다. 그럴 만합니다. 법원도 그렇게 봤으니까요.

미국에서 기계를 못 판 하우는 특허를 받고 얼마 안 돼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런던의 코르셋 제조업자에게 기계를 맞춰 주다 사이가 틀어졌고, 돌아올 뱃삯이 없어 기계와 특허증까지 저당 잡혔습니다. 1849년 뉴욕에 내려 보니 자기 특허를 그대로 쓴 재봉틀이 여기저기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두 해 뒤에는 1851년 특허를 받고 회사까지 세운 아이작 싱어가 여기에 가세했습니다.

하우는 새 투자자를 구해 특허증을 되찾고 소송을 걸었습니다. 첫 재판 상대는 싱어가 아니라 리로 앤 블로젯이라는 작은 회사였습니다. 1852년 7월 보스턴 연방법원의 스프레이그 판사가 하우 손을 들어 줬고, 이 판결을 들고 나머지 회사들에 차례로 가처분을 걸었습니다. 이듬해 5월 휠러 앤 윌슨이 처음으로 사용료를 내기로 했습니다. 당시 하우가 부르던 값은 재봉틀 한 대에 25달러였습니다. 싱어도 1854년에 만 달러대 합의금을 물고 같은 줄에 섰습니다.

여기서 끝나면 통쾌한 이야기입니다. 발명가가 이겼고, 베낀 쪽이 돈을 냈습니다. 그런데 이때까지 하우는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재봉틀이 팔려야 25달러가 들어오는데, 소송이 산업 전체의 발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긴 사람도 재봉틀을 못 만들었습니다

이유는 하우의 특허가 재봉틀 전체가 아니라 바늘과 박음질 방식 하나에만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쓸 만한 기계에는 다른 부품이 더 필요했습니다. 바늘이 곧게 오르내리고 천을 눌러 주는 쪽은 싱어의 특허였습니다. 한 땀 뜰 때마다 천을 앞으로 밀어 주는 장치는 휠러 앤 윌슨의 앨런 윌슨 특허였습니다. 그로버 앤 베이커는 또 다른 박음질 특허를 쥐고 있었습니다. 어느 회사든 제대로 된 재봉틀을 만들면 남의 특허를 밟았습니다. 그래서 하우가 이긴 뒤에도 넷은 서로를 계속 고소했습니다. 신문은 이걸 '재봉틀 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재개발 구역을 떠올리면 됩니다. 건물 하나를 올리려면 네 필지가 다 필요한데 땅 주인이 넷입니다. 각자 자기 땅에 담을 치고 옆집을 고소하는 동안 그 자리엔 아무것도 서지 않습니다. 하우는 가장 좋은 필지를 가진 사람이었을 뿐, 혼자서는 똑같이 아무것도 못 짓는 처지였습니다.

하우는 가장 좋은 필지를 가진 사람이었을 뿐, 혼자서는 똑같이 아무것도 못 짓는 처지였습니다.

1856년 10월, 올버니

담을 허물자고 한 사람은 그로버 앤 베이커의 사장 올랜도 포터였습니다. 변호사 출신이라 소송비가 얼마나 드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856년 그는 하우와 다른 두 회사에 제안했습니다. 서로 고소하지 말고 특허를 한 바구니에 넣자. 그리고 재봉틀을 만들고 싶은 다른 회사가 오면 바구니째 빌려주고 돈을 나누자.

하우는 처음에 반대했습니다. 잃을 게 가장 많은 쪽이었으니 그럴 만합니다. 그래서 조건을 걸었습니다. 바구니를 최소 스물네 회사에 열어 둘 것, 그리고 자기 몫을 따로 뗄 것. 나머지 셋이 받아들였고, 10월 24일 뉴욕주 올버니에서 계약서를 썼습니다. 미국 산업에서 처음 나온 특허 풀입니다.

돈은 이렇게 돌았습니다. 바깥 회사가 재봉틀 한 대를 만들면 15달러를 한 번만 냅니다. 그중 5달러는 하우 몫입니다. 3달러는 특허 침해자를 잡는 소송 기금으로 빼 둡니다. 남은 7달러를 넷이 똑같이 나눕니다. 그러니까 하우는 한 대에 6달러 75센트를 받았습니다. 전에 받던 25달러의 4분의 1 정도입니다.

15달러
바깥 회사가 재봉틀 한 대에 낸 돈. 전에는 회사마다 따로 내야 했고, 그마저 소송 중이라 낼 곳이 없었습니다.

받는 돈은 줄었는데, 그때부터 하우가 부자가 됐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담이 허물어지자 건물이 섰습니다. 싱어는 1856년 2,564대를 만들었는데 1860년에는 1만 3천 대를 넘겼습니다. 4년 만에 다섯 배입니다. 같은 1856년 싱어의 동업자 에드워드 클라크는 값을 다달이 나눠 내는 할부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목돈으로 기계를 못 사던 사람들이 다달이 몇 달러씩 내고 집에 들였습니다. 그 기계가 한 대 팔릴 때마다 하우에게 돈이 들어갔습니다.

스미스소니언의 재봉틀 연구자 그레이스 로저스 쿠퍼는 하우가 1856년부터 특허가 만료된 1867년까지 200만 달러 넘게 받았을 것으로 봤습니다. 1867년은 하우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합니다. 재봉틀을 거의 못 팔았던 사람이 백만장자로 눈을 감았습니다.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보는 DVD와 디지털 방송도 이 바구니 위에서 돌아갑니다. 1997년 영상 압축 규격 MPEG-2를 쓰려면 회사 아홉 곳이 나눠 가진 특허가 다 필요했습니다. 누구도 혼자 재생기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미국 법무부가 문제 삼지 않겠다고 답한 뒤 특허를 한 창구에 모으고, 재생기를 만드는 회사는 창구 한 곳에만 돈을 내게 했습니다. 이걸 두고 업계는 '현대식 특허 풀의 첫 사례'라고 부릅니다. 141년 전 올버니 계약서와 뼈대가 같습니다.

하우가 이겨서 부자가 된 게 아닙니다. 이긴 뒤에도 재봉틀을 못 만드는 건 그대로였습니다. 넷이 싸움을 멈추자 기계가 팔렸고, 기계가 팔리자 특허가 돈이 됐습니다. 특허는 판결로 돈이 되지 않습니다. 남이 그걸로 물건을 팔 때 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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