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닉슨 TV 토론 66년 — '라디오는 닉슨' 근거는 178명
Woody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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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26일 (토)
케네디·닉슨 TV 토론 66년 — '라디오는 닉슨 승'의 근거는 178명이었습니다
TV가 대통령을 골랐다는 이야기는 그날 밤보다 그 뒤에 더 크게 자랐습니다
세 줄 요약
- 66년 전 오늘 케네디와 닉슨이 양당 대선 후보로는 처음 TV 토론을 했습니다. TV로 본 사람은 케네디가, 라디오로 들은 사람은 닉슨이 이겼다고 봤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돕니다.
- 라디오 청취자를 따로 센 조사는 한 곳뿐이었고, 그 조사에서 승자를 꼽은 라디오 청취자는 178명이었습니다.
- TV 화면이 판단을 바꾸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날 밤 남은 증거가 이야기의 크기를 받쳐 주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진 한 장만 봐도 결말을 알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은 볕에 그을린 얼굴로 카메라를 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얼굴이 창백하고 수염 자국이 거뭇합니다. 그는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훔칩니다.
66년 전 오늘, 1960년 9월 26일 밤이었습니다. 시카고의 CBS 계열 방송국 WBBM 스튜디오에서 두 대선 후보가 TV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민주당은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존 F. 케네디, 공화당은 현직 부통령 리처드 닉슨이었습니다. 4년 전 민주당 경선 때 후보 둘이 TV로 토론한 적은 있습니다. 그래도 양당 후보가 본선에서 맞붙은 건 이날이 처음이었습니다. 진행은 CBS 기자 하워드 K. 스미스가 맡았습니다. 두 사람은 한 시간 동안 교육과 의료, 농업 같은 국내 정책을 두고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닉슨에게는 운이 나쁜 날이었습니다. 한 달 전 유세 중에 차에서 왼쪽 무릎을 다쳤는데, 상처에 세균이 들어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퇴원한 지 얼마 안 된 몸으로 스튜디오에 왔습니다. 방송사가 분장을 권했지만 그는 거절했습니다. 대신 수염 자국을 가리는 '레이지셰이브'라는 파우더만 발랐습니다. 브리태니커는 이 한 시간을 본 사람을 약 7,000만 명으로 잡습니다.
이날 밤에는 나중에 이야기 하나가 따라붙었습니다. TV로 본 사람은 케네디가 이겼다고 봤고, 라디오로 들은 사람은 닉슨이 이겼다고 봤다는 이야기입니다. 말과 논리로는 닉슨이 앞섰는데 얼굴 때문에 졌다는 뜻이 됩니다. TV가 대통령을 골랐다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럴 만한 이야기입니다. 1950년에는 미국 가구의 11%만 TV를 갖고 있었는데, 1960년에는 88%가 갖고 있었습니다. 10년 만에 TV는 있는 집보다 없는 집을 찾기 어려운 물건이 됐습니다. 새 기계가 세상을 바꾼 밤을 하나 고르라면 이날만 한 장면이 없습니다. 우리도 선거 때마다 후보의 표정과 넥타이 색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라디오 청취자를 따로 센 곳은 한 군데였습니다
동창회에서 도는 무용담은 처음 들을 때 가장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느냐고 물으면 이름이 잘 안 나옵니다. 이 이야기도 출처를 따라가면 사람 수가 금방 줄어듭니다.
미디어 연구자 엘리후 카츠와 제이컵 펠드먼은 1962년에 펴낸 연구에서 토론을 두고 나온 여론조사를 한데 모아 살폈습니다. 조사 대부분은 라디오로 들은 사람을 따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따로 나눈 곳은 필라델피아의 시장조사 회사 신들링어 하나였습니다.
신들링어 조사의 라디오 청취자 가운데 닉슨이 이겼다고 답한 사람은 케네디라고 답한 사람의 두 배쯤 됐습니다. 이 숫자만 보면 이야기가 깔끔합니다. 문제는 숫자 뒤에 선 사람 수입니다. 응답자 2,100여 명 가운데 라디오로 들었다는 사람은 282명이었습니다. 그중 승자를 꼽은 사람은 178명이었습니다. 50개 주로 나누면 주마다 네 명이 안 됩니다.
'라디오는 닉슨'이라는 말 뒤에 선 사람 수
막대 길이는 응답자 2,100명을 기준으로 한 비율입니다. 자료: 신들링어 조사(1960), 밴실·펜델 재분석(1987). 출처 ↗
1987년 콜로라도주립대의 커뮤니케이션학자 데이비드 밴실과 수 펜델이 이 숫자를 뜯어봤습니다. 두 사람이 보기에 이 정도 인원으로는 전국 표본이 되지 않았습니다. 라디오 청취자가 어디 사는 사람인지 조사에 적혀 있지 않다는 점도 짚었습니다. 1960년에 TV 없이 라디오로만 토론을 들은 사람은 TV가 덜 들어간 시골에 많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 표본이라면 결과가 닉슨 쪽으로 기울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확인할 길도 없습니다. 허핑턴포스트에 실린 한 분석에 따르면 신들링어는 원자료를 잃어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라디오 청취자와 TV 시청자가 각각 어느 당을 지지했는지 알려 줄 정보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TV 쪽 숫자도 이야기만큼 크지 않았습니다. 이 조사 결과는 판본이 둘로 전해집니다. 어느 쪽으로 봐도 TV 시청자 열 명 중 네다섯 명은 승자를 꼽지 않았습니다. 케네디를 꼽은 사람보다 많습니다.
증거를 다 모아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2017년 캘리포니아주립대 풀러턴의 존 브루슈키와 로라 디바인이 당시 기록을 세어 봤습니다. 닉슨의 라디오 승리를 보여 주는 기록은 세 건이었습니다. 신들링어 조사를 빼면 나머지 둘은 기자들이 전한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는 애틀랜타 길거리에서 몇 사람에게 물어본 칼럼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남부 주지사 회의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을 전한 기자의 글이었습니다.
400만 명, 72%, 200만 표
증거가 가늘어도 이야기에는 계산서가 붙었습니다. 기자 시어도어 화이트는 1961년에 펴낸 선거 기록 『대통령 만들기 1960』에서 셈을 했습니다. 네 차례 토론만 보고 표를 정한 유권자가 400만 명이 넘고, 그중 72%인 300만 명 가까이가 케네디를 찍었다고 봤습니다. 그러면 케네디가 얻은 표 차 가운데 200만 표는 TV 덕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화이트가 적은 실제 표 차는 11만 2,000표였습니다. 200만은 그 열여덟 배 가까이 됩니다.
화이트 본인도 '이 추정이 맞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이 계산은 가정 위에 서 있습니다. 토론만 보고 표를 정했다는 건 유권자 본인의 대답입니다. 토론이 없었다면 그 사람들이 누구를 찍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200만이라는 숫자가 붙자 이야기에 무게가 실렸습니다.
논문으로 나온 첫 실험은 43년 뒤였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신화였다고 결론 내고 싶어집니다. 밴실과 펜델은 1990년에 직접 실증 연구도 했는데, 닉슨의 라디오 승리는 다시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결과는 학회 발표에 그치고 논문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반대쪽 증거도 있습니다.
2003년 미네소타대 정치학자 제임스 드럭먼이 이 질문을 실험에 올려 논문으로 냈습니다. 1960년 토론을 모르는 대학생들을 모아, 절반에게는 첫 토론을 TV 화면으로 보여 주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소리만 들려줬습니다. 드럭먼은 이 토론을 고른 까닭 하나를 논문에 적었습니다. 널리 믿는 것과 달리, TV 화면이 시청자 반응을 바꿨다는 증거가 그때까지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결과는 이야기 쪽이었습니다. 누가 이겼는지 1에서 7까지 점수를 매기게 했더니(낮을수록 케네디 승), 화면을 본 학생은 평균 2.57, 소리만 들은 학생은 3.28이 나왔습니다. 화면을 본 쪽이 케네디 승리로 더 기울었습니다. 후보를 인상으로 판단하는 경향도 강해졌습니다. 다만 참가자는 2000년대 대학생이었습니다. 1960년의 유권자가 아닙니다.
학계는 지금도 둘로 갈려 있습니다. 1996년 커뮤니케이션학자 시드니 크라우스는 신들링어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을 직접 인터뷰했습니다. 그 끝에 TV는 케네디, 라디오는 닉슨이라는 결과가 신화는 아니라고 결론 냈습니다. 앞서 기록을 세어 본 브루슈키와 디바인은 2017년 이 결론을 반박했습니다. 1960년 전국선거연구 자료를 새로 분석해 보니 신들링어의 라디오 표본에 공화당 지지자가 많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습니다.
처음 이야기는 지도력이었습니다
그날 밤 TV가 몇 사람의 마음을 바꿨는지는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확인할 수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자랐는지입니다.
커뮤니케이션학자 세라 메흘트레터와 데일 허벡은 1960년 토론을 다룬 당시 기사 567건을 읽었습니다. 2004년 대선 때 이 토론을 언급한 기사 100여 건도 읽었습니다. 두 사람이 정리한 흐름은 이렇습니다. 첫 토론을 설명하는 이야기는 처음에 대통령다운 지도력에 무게를 뒀다가, 시간이 갈수록 외모 쪽으로 옮겨 갔습니다. 2004년 기사들은 첫 토론의 겉모습을 거의 전부로 다뤘습니다.
동창회 무용담도 그렇게 자랍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보다 나중에 전해 들은 사람이 더 선명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1960년 가을도 전해 들은 쪽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 토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닉슨의 땀방울과 수염 자국은 해가 갈수록 굵어졌습니다.
1947년 4월 21일, 매키스포트
두 사람의 첫 토론은 사실 1960년이 아니었습니다. 1947년 4월 21일, 펜실베이니아주의 탄광·철강 도시 매키스포트의 펜-매키 호텔에서였습니다. 갓 당선된 초선 하원의원 둘이 노조 권한을 줄이는 태프트-하틀리 법안을 두고 맞붙었습니다. 둘 다 하원 노동위원회 소속이었고, 지역 토론 모임이 두 사람을 불렀습니다. TV가 집집마다 들어오기 전이었으니 외모 이야기가 끼어들 틈은 없어 보입니다.
다음 날 지역 신문 『매키스포트 데일리 뉴스』는 두 사람이 법안을 두고 어떤 논리를 폈는지를 적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두 연구자가 2022년 논문에서 그 뒤에 나온 글들을 추적했습니다. TV 시대의 회고들은 이 토론마저 두 사람의 외모와 말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다시 썼습니다.
TV 카메라가 없던 방의 토론까지 얼굴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무용담을 키운 건 그 자리에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날 밤 화면이 표를 몇 장 옮겼는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이야기가 어느 쪽으로 자랐는지는 압니다.
출처·참고
- 출처 ↗ First Kennedy-Nixon Debate, 26 September 1960 — 존 F. 케네디 대통령 도서관
- 출처 ↗ The Great Debate: First televised presidential debate held at CBS Chicago — CBS 시카고(2024)
- 출처 ↗ The impact of the 1960 JFK-Nixon debate — CNN(2016)
- 출처 ↗ 1st US presidential debate now online — WCBU/AP(2016). 1956년 스티븐슨·키포버 ABC 경선 토론
- 출처 ↗ Cabinet 24호(2006–2007) — 레이지셰이브 파우더
- 출처 ↗ Television in the United States: The Kennedy-Nixon debates — 브리태니커
- 출처 ↗ Vancil & Pendell, The Myth of Viewer-Listener Disagreement in the First Kennedy-Nixon Debate, Central States Speech Journal 38(1), 1987 — ERIC 서지
- 출처 ↗ Viewer-listener disagreement — Media Myth Alert(밴실·펜델 논문의 표본 수치 인용)
- 출처 ↗ David Greenberg, Did JFK really win because he looked better on television? — Slate(2010)
- 출처 ↗ Did Nixon Win With Radio Listeners? — 허핑턴포스트
- 출처 ↗ James N. Druckman, The Power of Television Images: The First Kennedy-Nixon Debate Revisited, Journal of Politics 65(2), 2003
- 출처 ↗ Bruschke & Divine, Debunking Nixon's radio victory in the 1960 election, The Social Science Journal 54(1), 2017
- 출처 ↗ Remembering and Re-Creating the Great Debates of 1960 — Communication Quarterly 64(2)
- 출처 ↗ Herbeck & Mehltretter Drury, The first Kennedy-Nixon debate: the McKeesport Junto of 1947, Argumentation and Advocacy 58, 2022
- 출처 ↗ Kennedy-Nixon Taft-Hartley Debate 표지판(펜실베이니아 역사박물관위원회, 2012) — H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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